지난달 30일 오후 대전시 중구 대흥동에 위치한 라이브 클럽 벗찌. 들어가니 드럼과 기타가 뒤섞인 소리가 시원하게 쏟아진다. 대전 토박이 밴드 베이비 필이 저녁에 있을 공연 리허설 준비에 한창이었다. 클럽이 으례 그렇듯, 담배연기도 가득했다.
그러나 술은 없었다. 클럽에 술이 없다? 술없이 장사가 되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베이비 필은 이렇게 받아친다. 술에 취하면 음악이 잘 들리겠어요? '돈'보다는 '음악'이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벗찌에는 기자외에 또 한명의 이방인(?)이 함께했다. 스피커 제조 업체 소노스피커의 정재연 마케팅 팀장이다. 그는 벗찌에 왜 왔을까? 인디 음악 마니아라서? 아니다. 인디 밴드에 돈이나 스피커를 지원하려고? 아니다.
그가 벗찌를 찾은것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개인적인 취미 활동은 아니었다. 업무의 연장선상이었다.
인디밴드를 돕고는 싶은데 돈으로 후원할 여력이 없으니 이들을 인터뷰해 외부에 알려주고 싶었단다. 소노코리아 직원은 사실상 2명이다. 아직은 빠듯한 살림이다.
■ 스피커는 듣는 사람 위해 존재한다
“그냥 살아보겠다고 이 일을 하는 건 아니에요. 스피커를 만드는 회산데 어떻게 해서든 음악과 관련한 문화사업에 기여를 하고 싶었죠.”
정 팀장이 인터뷰 시리즈를 마련한 것은 음악이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에서다. 최근 몇몇 온라인 음악 사이트에서 고가 스피커를 가진 사람들이 마치 음악 고수인 것처럼 취급받는 현실이 씁슬 하다는 것. 음악을 '글'로 배우는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한마디다.
“음악이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어야 하는데, 돈 있는 사람들이 스피커를 집에 두고 자랑하는 가구처럼 알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좀 안타까워요.”
그는 스피커 회사에 다닌다. 스피커와 음악은 하는일이 다르다. 스피커는 음향 공학과 더 가깝지 사람들이 즐기는 음악을 알리고 홍보하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그는 음악을 알리겠다고 나섰다.
스피커나 음악이나 모두 '누군가 듣는다'라는 걸 전제하죠. 당연히 음악에 관심이 가지 않겠어요? 게다가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저희 제품도 더 잘 팔릴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돈이 없으니 우선 몸으로라도 뛰려고요. 이렇게 만나서 인터뷰 한 내용을 홈페이지에 싣고 음원 링크도 걸다보면 둘 모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그런만큼, 정 팀장은 첫 인터뷰이 선정에도 신중을 기했다. 첫째, 음악을 잘해야 하고 둘째, 뭔가 의미있는 음악이었으면 좋겠고, 셋째는 철학이 있는 뮤지션이어야 했다. 그렇게 선정된 인디밴드가 베이비필이다.
베이비 필은 10년이나 밴드 생활을 한 만큼 연주실력이 뛰어났다. 둘째, 멤버들이 앨범 전곡을 함께 작사작곡하면서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셋째, 우리가 처음인 음악을 하고 싶다!라는 원대한 철학이 있었다.
■ 밴드 10년이면 U2만큼 한다!
“10년을 같은 멤버로 유지할 수 만 있다면 누구나 U2가 될 수 있다죠”
정 팀장과의 인터뷰에서 베이비 필 천태수 씨가 내뱉은 첫 마디다. 안그래도 '배고프다'라는 이미지가 강한 인디밴드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 내려오면 현실은 더 심각하다. 이건 단지 '먹고 살기 힘들다'라는 틀에박힌 이야기가 아니다. 그걸 떠나 밴드활동에 필요한 기본 인프라가 전혀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것.


기본적으로 악기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녹음실, 연습실, 그리고 공연장까지 지방에는 없는 것 투성이다. 이날 베이비필과 만난 벗찌 역시 대전에서는 거의 유일한 공연무대였다. 지난 연말 베이비 필이 10년만에 첫 앨범을 발매할 때도 그랬다. 각종 '문화의 거리'를 만들며 돈을 쏟는 것보다 각 지역에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문화인들에 대한 관심이 더 중요하다는 음악 관계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멤버들 모두 무대 대관, 독립영화 제작, 피아노 조율, 그래픽 디자인 등 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음악만 해서는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이들은 연주를 그만두지 않을까.
“저희 노래는 음악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보다는 듣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죠. 돈에 연연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이 들어가면서 잃어버리게 되는 꿈에 대한 노래에요.”
천씨는 그 이유를 곡을 만드는 자신들보다 듣는 사람들에서 찾았다. 미국인과 동양인 혼혈 문제를 다룬 ‘아멜아시안’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한 ‘머니’ 대안세상을 꿈꾸는 ‘뉴 월드’ 등에는 베이비 필이 추구하는 세계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 이야기들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뜻이다.
■ “원더걸스만 음악인 건 아니죠”
‘동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생’이다. 베이비 필이 말하는 공생은 소노 스피커가 추구하는 가치와도 맞물린다는 게 정 팀장의 설명이다.
그가 전하는 소노의 첫 스피커 'M45' 탄생기는 이재에 밝은 이에겐 황당하게 들릴지 모른다.
2009년, 처음 정 팀장에게 사업제안서를 내민건 역시 가진건 '맨몸'과 '스피커 개발 기술' 뿐인 20대 청년 김진 실장이었다. 생활비는 '여친'이 보조해준 20만원, 사무실은 대형마트 자판기 옆 의자, 차량은 아버지한테 빌린 봉고. 애초에 맨땅에 헤딩하기로 시작한 사업이다. 지난 1년간 개발비만 1억이 들걸 상상이나 했을까. 지금 소노스피커가 소속된 OBS코리아 최우식 대표를 만나 후원을 받기까지 우여곡절을 거듭했다.

피시파이용 첫 스피커를 세상에 내놨고, 뜨거운 호응에 첫 물량 50조가 동이 났다지만 소노스피커는 여전히 적자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문화산업이 살아야 음악 산업 전체가 튼튼해진다'는 공생을 말한다.
유소년 축구가 발달한 브라질에서 축구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도 인디밴드같은 문화가 확실히 다져져야 더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있어요. 소녀시대나 원더걸스도 좋지만 거기에 모든 자원이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향후 제품 라인업을 추가해 공연용 스피커를 만들게 되면 무료 대여 같은 물질적 지원도 할 추가할 계획이다. 이뿐 아니다. 이들의 오지랖은 음악을 넘어 제품을 만드는 생산공정에도 뻗친다.
“스피커에 색을 입히는 도장 공장에 갔을 때의 일이었어요. 그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났죠. 아, 난 본적도 없는 저 동남아시아 사람이 우리 제품을 만들어주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첫 제품이 나오지 못했겠죠. 그분들 인터뷰도 하고싶어요”
■ 누군가 듣고있다!
“그런데 왜 베이비 필 입니까?”
공연장을 나서기 전, 정 팀장이 베이비 필에 묻는다. ‘베이비’라는 이름을 쓰기엔 조금 ‘아저씨’스러워 보였기 때문일까.
“처음엔 ‘아기느낌’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설명하기 어렵게 됐죠. 그래서 ‘초심’이라고 말합니다. 초심으로 활동하자는 그런 뜻이죠.”
말로는 쉽지만 행동은 어려운 게 초심이다. 스피커를 실제로 만드는 사람, 그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올 음악을 짓는 사람,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사람 모두를 아우르고 싶다는 소노스피커의 야심은, 어쩌면 정말 지키기 어려운 초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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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을 나설 무렵, 베이비 필은 다시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막 첫번째 앨범을 내놓은 십년차 밴드. 그리고 이제 막 첫 스피커를 세상에 내놓은 소노스피커. 두 팀은 그 초심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누군가 듣고 있다”는 걸 강조했다.
이 시간, 누군가 자신의 음악을 그들이 만든 스피커로 듣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들에게서 10년후에도 변하지 않는 초심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