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눈에 비친 디지털

[연중기획]UX가 경쟁력이다-4

일반입력 :2010/01/31 15:44    수정: 2010/02/01 11:36

황치규 기자

언제부터인가, '이공계의 위기'라는 말이 당연하게 들린다. 사실 부정하기 힘든 말이다. 이공계는 분명 위기다.

그러나 이공계만 위기인가? 인문학도들이 들으면 꽤 서운할 것이다. 이공계의 위기라는 말이 울려퍼질때 인문학은 오래전부터 절망을 노래했다. 공학에게는 '산업의 역군'이란 공치사라도 붙었으나 인문학은 세월좋을때나 하는 배부른 학문이라는 황당하고도 불편한 시선에 휩싸였다.

사회학, 심리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한다고 하면 '그거 해서 뭐할건데?'란 반응들이 대부분이다. 공대는 그래도 기술을 배우지 않느냐?고 훈계하는 이들도 있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 지식 기반 서비스 경제라는 그럴듯한 패러다임이 등장한 가운데, 학문의 가치는 취업이 말해주는 세상이 됐다. 인문학으로는 먹고살기가 참 힘든 시절이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펼쳐졌다. 최첨단 기술이 지배하는 IT업계에서,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그거 해서 뭐하나 싶던 분야 전공자를 뽑는 구인광고도 늘었다. 개발자와 기획자 그리고 인문학 전공자가 팀으로 뛰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정 프로젝트에선 인문학 전문가들이 선봉장을 맡는 파격적인 상황까지 벌어진다. 사용자 경험(UX)이 차별화에 목마른 IT업계를 강타하면서 펼쳐진 풍경들이다.

인문학과 디지털의 융합, UX 혁신 급물살

누군가는 '디지털 세상에서 왜 인문학인가?'물을 것이다. 기술이 우선 아닌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용자가 중심에 서는 UX 분야에서 인문학은 이미 중량감있는 존재로 떠올랐다. 사람냄새를 맡는데 있어 인문학만한게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물론이고 국내 기업들까지 UX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인문학을 주목하는 이유다.

"UX라는 말 자체가 사용자와 경험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겁니다. 사람이 갖고 이는 근본적인 욕망, 윤리, 그리고 주관적인 느낌에 대해서 가장 심도있게 다루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에요. 인터넷 산업이 이제 성숙기로 진입한 만큼, 사람들이 신기해할만한 서비스를 빠르게 만들어 내기 보다는 본질적으로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게 중요해졌습니다. 본질적인 사고에 접근하는 사고를 길러주는 인문학적 소양은 UX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중 하나에요."

NHN 이윤희 UX랩장의 말이다.

사용자 관점에서 기술은 만능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 좋은 기술이라도 빈구멍은 생기게 마련이다. 불편하고 어려운 기술은 UX와는 상극. 이 과정에서 UX는 해결사가 될 수 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UX디자인센터의 임정화씨(심리학 전공)는 "휴대폰에서 불편한 부분을 웹으로 채워줄 수 있고 거꾸로 모바일을 웹의 보완재로 채울 수도 있다"면서 이런 요구를 파악하려면 인문학적인 통찰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인문학 전공자들은 UX팀에서 주로 리서치 업무에 투입된다. 10명 정도의 사용자를 놓고 인류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직접 따라다니면서 사용자 성향도 파악한다. 일대일로 만날때도 있다. 포커스그룹 인터뷰를 통해 사용자가 관심을 집중 분석하는 것도 주요 임무다. 이를 기반으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분석 결과를 뽑아내고 서비스에 반영한다.

NHN은 최근 네이버홈을 개편하면서 아이트래킹을 이용해 사용자가 실제로, 네이버 홈페이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행동 패턴을 연구했다. 스마트파인더와 같이 특정한 무엇을 찾게 해주는 서비스의 경우 사용자들이 실제로 해당 제품을 어떤식으로 찾고자 하는지, 직접 사용 현장에 나가서 리서치도 하고, 니즈를 도출했다.

다음이 제공하는 모바일 지도 서비스도 인문학적 분석이 많이 가미된 사례다.  새로운 기술이나 디자인이보다는 사용자가 이걸 왜 쓰는지에 초점을 맞췄다는게 회사측 설명. 다음 카페를 꾸밀 수 있는 서비스도 사용자 분석이 많이 녹아 들었다.

임정화씨는 "카페가 글을 쓰고 읽는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간인 만큼, 어떻게 보여주는지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면서 "사용자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쉬우면서도 예쁘게 꾸밀 수 있도록 중간중간에 리서치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1~2년뒤 사용자들에게 어떤 가치를 줘야 하는지 예측하는 고난도 분석 업무도 인문학 전공자들의 몫이다. 다음의 임정화씨는 "사용자들이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찾아야할 것들은 무엇인지, 그런것들이 서비스에 잘 반영되고 있는지 확인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UX와 잘 어울리는 인문학 분야는 인지심리학과, 문화인류학이다. NHN 이윤희 랩장은 "내부 UX 담당자들의 전공을 살펴보면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인간 심리와 니즈 파악 그리고 행동 관찰을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전공자들이 1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문학적 가치, 좀더 강화돼야

 

인터넷 업계에서 'UX의 원조'로 불리는 야후는 최근 사용자 분석을 위해 사회과학자들 영입에 적극 나서 국내외 미디어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현재 야후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회과학자수는 현재 25명에 이른다고 한다. 야후가 인문학 전문가를 늘리는 것은 UX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인터넷 사용자들의 심리와 행동 성향을 더욱 입체적으로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야후에서 일하는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처칠은 "무엇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며 “야후의 향후 경쟁력은 여기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야후 뿐만이 아니다. UX 전담조직을 운영하는 대다수의 IT업체들이 인지심리학, 인류학, 사회과학 등 인문학 전문가 영입에 앞다퉈 나섰다.

국내의 경우 UX 인력 풀은 선진국인 미국과 비교하면 부족하다는 평가다.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UX에 어울릴만한 인문학 전공자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가 들린다.

석박사급 전문가들도 많지 않다. NHN 이윤희 랩장은 "현재까지는 학부는 인문학, 대학원은 디지털미디어나 정보 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면서 "인문학과 디지털을 같이 볼 수 있는 이들이 선호되고 있다"고 전했다. 인문학만한 사람보다는 인문학 플러스 디지털을 이해하는 전문가들을 필요로 한다는 얘기다.

인문학적 소양을 활용하는 측면에서 갈길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UX팀의 인문학 전공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의미있는 수준으로 발전시키는데는 아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면서 "개발자, 디자이너, 기획자, 인문학 전공자들이 섞여있는 UX팀 특성상 협업 스타일에 아직은 차이가 있다"고 전했다.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하니 전공자들을 뽑기는 했는데, 노하우를 제대로 녹여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관계자는 "UX팀이 생긴지 10년도 안된 조직이니 아직은 발전 단계로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현재 진행형임에도 불구하고 인문학과 디지털의 융합은 UX 열풍과 함께 IT업계에서 전략적 가치가 점점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NHN UX랩장 출신인 이지현 서울여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UX 인력들의 경쟁력은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들만 있어서는 안된다"면서 "디자인과 경영이나 심리, 사회, 문화 인류학 담당자들도 꼭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신성분이 각기 다른 이들이 협력해 뭔가 만들어냈을때 '와우'가 나오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협업으로 학제간 교류, 이른바 통섭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세대학교 김진우 교수는 "협력을 정형화시키고 프로세스화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한데, 사회과학하는 친구들이 이런것을 잘한다"고 말했다.

황금만능주의 속에서 미운오리새끼로 전락했던 인문학은 IT업계 메가트렌드 UX를 등에 업고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인문학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할 정도는 아니다. 가능성을 확인하는 정도다.

인문학은 디지털과 만나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까? 인문학의 눈에 비친 디지털은 UX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필승카드로 떠오르게 될까? 돌아가는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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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임정화씨는 이렇게 말한다.

"학교에서 배운 인문학과 UX팀에서 실제 하는것은 차이가 있어요. 학교에서도 중간 지점을 찾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사회에 진출한 인문학도들이 길을 잘 닦아놔야 할것 같아요. 인문학은 안된다는 인식은 심어주지 않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