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했죠. 전자책을 만들자고 모였는데 누구하나 (전자책을) 만져본 적도 없었거든요.
아이리버가 최근 야심차게 선보인 전자책리더 '스토리'를 만든 개발자들이 털어놓은 후일담이다. 듣고보니 참 놀랍다.
'스토리'가 어떤 제품인가? 아이리버가 아마존 킨들이 주도하는 세계 전자책 시장 공략을 위해 6개월간 공들여 개발한 필승카드다. 이런 전략 제품을 만드는 개발자들이 전자책을 모르는 상황에서 덤벼들었다니....'하면된다 정신'도 이만한게 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제품이 쏟아지는 요즘 디지털 세상은 기업들이 그냥 하기만 해서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다. 만들면 저절로 팔리는 시대는 무덤속에 들어간지 오래다. 무턱대고 하게된 것이든, 치밀하게 준비해서 한 것이든 기본적으로 잘 만들어야 버텨볼 수 있다.
'스토리'라고 해서 다를 리 없다. 아이리버가 개발자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스토리 개발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드는 과정이야 어찌됐든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판단이 들었기에 시장에 내놨을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다. 황당한 마음으로 전자책을 만들겠다고 덤벼든 아이리버 개발자들의 뒷얘기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그냥 열심히 하니 잘 나왔더라식의 밥먹으면 배부른 스토리는 '스토리'에는 없을 것 같다. 좌충우돌을 테마로 흥미로운 스토리를 엮을 수 있는 소재들이 '스토리'에는 듬뿍 담겨 있을 것 같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이리버 전자책 개발팀을 이끄는 백창흠 부장을 만나보니 스토리 개발과 관련한 뒷얘기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이것들을 그냥 묻어둘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아이리버 스토리 뒷담화는 이렇게 시작된다.백창흠 부장이 기자에게 던진 첫마디는 황당하고 신기했다였다. 그 역시 전자책에 익숙치 않은 상황에서 스토리 개발에 뛰어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MP3플레이어와는 다른 전자책의 비밀
“일단 해외에서 호평 받고 있는 아마존 킨들과 소니 제품을 사서 약 3주 정도 써봤어요. 벤치마킹이라고는 하지만 일반 사용자 수준에서 처음 만져보는 수준이었죠. 그런데 ‘황당하고 신기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세상에, 첨단기기라는 제품이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부분이 그냥 까맣고 하얗기만 한 게 진짜로 너무 심플한 거예요. 어우, 왜 이렇게 단순하게 만들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겼죠.”
MP3플레이어와 전자수첩을 만드는데 잔뼈가 굵은 사람들인 만큼 휴대용기기에는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난생 처음 본 전자책은 사람을 당황케 하는 물건이었다. 백 부장은 전자책의 비밀을 디스플레이에서 찾았다.
전자책 화면은 일명 ‘전자잉크’를 사용하는 일렉트로닉 페이퍼 디스플레이(EPD)다. 콘텐츠를 보면서 책장을 넘길 때 ‘깜빡’하고 입으로 소리 내는 시간만큼 화면전환에 시간이 걸린다. 일반 MP3나 PMP에 탑재된 LCD의 빠른 화면전환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약간 답답한 감마저 들었다고.“이걸 어떻게 사람들한테 이해시켜야 하느냐가 관건이었죠. 생소한 제품이다 보니 자칫 기술력이 떨어져 느리게 넘어간다고 생각할 수 도 있지 않겠어요? LCD와는 달리 전자잉크제품 자체가 전환속도가 느린 건데 말이죠. 그래서 비교적 회색에 비해 반응속도가 빠른 검정색과 하얀색을 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죠.”
실제로 ‘스토리’ 역시 화면상에서 움직이는 커서는 모두 검정이나 하얀색을 사용한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내려면 선택할 수 있는 색상의 폭이 좁았다는 설명이다.
백 부장의 설명에 따르면 전자책에 사용되는 디스플레이는 사람 눈이 일반 종이를 인식하는 것과 비슷해서 눈의 피로를 최대한 줄여준다. 그래서 장시간 책을 보기에는 적절하지만 화려한 그래픽을 구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일단 전자책도 책이다 보니깐 가독성에 더 신경을 써야 했어요. 글자체라든가, 전체적인 디자인이 책과 동떨어지면 안됐기 때문에 처음 기획단계에서부터 실제 책 편집 디자이너와 함께 작업했죠. MP3플레이어였다면 파일을 얼마나 더 잘 재생하느냐가 관건이었겠지만, 전자책이다 보니 여러 문서들을 얼마나 잘 읽어낼 수 있는지, ‘뷰어’의 호환성에 더 신경을 써야 했어요.”
일단 한 번 만들어낸 전자책의 반응은 예상보다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아이리버가 태어난 지 2주 만에 초두물량 2천대가 동이 났다. 30만원 중반대의 적지 않은 가격이라는 점과 ‘전자책’이 국내에서 익숙하지 않은 제품임을 감안할 때는 놀라운 수요였다는 게 관계자들의 평이다.
“야근도 많이 했는데 그 피로가 뿌듯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죠. 사실 개발 기간 동안에는 대중교통이 다닐 시간에 들어가 본적이 거의 없었어요. 국내에 전자책 대기수요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나 아직 전자책이 초기단계인 국내시장에서 전자책이 완전한 제품일 수는 없다. 백부장은 펌웨어의 지속적입 업그레이드 중요성을 강조했다. 펌웨어는 휴대용 디지털 단말기 안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펌웨어’라는 용어가 사실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는 친숙한 단어는 아니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펌웨어’라는 단어 자체를 아이리버에서 처음 사용했어요. 2000년대 초반에 아이리버가 CD타입의 MP3플레이어를 국내에 처음 선보였는데요, 그때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 시킨다는 개념으로 펌웨어 개발제도를 선보였었죠.”
‘스토리’에 대한 사용자들의 요구도 끊이지 않는다. 게시판에 올라오는 소비자들의 요구가 때로는 ‘수준 이상’의 것이었다고. 태어난 지 3달, 업그레이드 3번. ‘스토리’에 반영된 소비자들의 기대는 지속된 펌웨어 업그레이드에서도 나타났다.
백 부장은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기능으로 ‘리플로우’를 꼽았다.
“리플로우는 전자책 콘텐츠 형식 중 PDF파일을 열람할 때 여백을 제외하고 글자 위주로만 깔끔하게 확대해서 볼 수 있도록 한 기능이죠. 실제로 PC에서 PDF를 이용할 때 사용되는 기능인데, 이걸 찾아내서 요청할 정도면 전자책 사용자들이 어느 정도 PC나 기기에 대해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을 갖고 있다고 봐야 되는 거죠.”
그렇다면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능은 뭘까. 현재 아이리버 홈페이지에서 진행하고 있는 ‘펌웨어 선호 기능 조사’에 참여한 2천여명 중 약 750여 명은 ‘전자사전’기능을 택했다.
“전자사전 기능이 업그레이드되고 나서 게시판에 반응이 곧바로 왔어요. 책을 보면서 사전을 찾는 팝업사전기능이 히트를 쳤고, 콘텐츠에서 커서를 옮기면 해당 단어에 대한 뜻이 바로 밑에 나오는 링크사전 역시 호평받았죠. 전자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로 봤어요.”
■진화하는 전자책의 미래
현재 스토리는 국내는 물론 영국과 독일 등지에서 판매되고 있다. 12월 중순 기준으로 약 5천900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전자책은 이미 마니아계층이 형성이 된 거 같아요. 스토리 나오기 전부터 전자책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 소니나 킨들 같은 제품에 대한 리뷰가 올라와 있었거든요. 그래서 스토리 역시 출시 된지 2주만에 처음 만들어낸 2천대 제품이 매진됐어요.”
아이리버 전자책개발팀이 바라보는 스토리의 현재와 미래는 어떨까?
“물론 아직 ‘완벽한 제품’이라고는 할 수 없겠죠. 그렇지만 지금까지 들어온 소비자들의 요구는 거의 대부분 반영됐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전자책에 최적화된 폰트를 개발해서 반영하는 게 목표에요. 가장 읽기 좋고 보기 좋은 글자체 말이죠.”
고객게시판을 업무 틈틈히 살펴보면서 개발 아이템을 찾아낸다는 백창흠 부장. 그러다보면 가끔 엉뚱한 의견들도 보게된단다.
“전자책을 거꾸로 들고 보게 해달라는 의견이 있었죠. 본인은 그게 더 보기 편하다는 말에 웃다가도, 또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여력이 되면 그 의견도 반영해 보고 싶죠.”
그는 내년엔 ‘스토리’가 한층 더 발전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래형 스토리’는 좀 더 큰 화면에 터치패널을 장착할 것이라고 살짝 귀띔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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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하게 시작해 짜릿하게 '스토리'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그는 대담하게 말한다.
“빨리 스토리와 다툴만한 타사 제품들도 시장에 나왔으면 좋겠어요. 콘텐츠와 기기가 다양해질수록 스토리도 더 커지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