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호령이 떨어졌다. 연구개발소장이 긴급하게 8층 사장실로 불려 들어간다.
“악!” 책상 위엔 지금까지 디지털큐브가 팔아온 PMP(휴대용멀티미디어플레이어)가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분해돼 널려 있다.
“삼성 휴대폰에서도 문제가 됐던 이 부품을 PMP에 굳이 쓴 이유가 뭡니까” 아이스테이션(전 디지털큐브)신
임 박전만 사장의 질타가 쏟아진다. 출시를 며칠 앞둔 신제품 생산 라인도 멈췄다.
‘전 라인업 중단’ ‘제품 출시 무기한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개발만 되면 품질은 고사하고 일단 팔고 보자는 식의 악습에 종지부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박전만 대표의 이처럼 요란했던 신고식은 고정관념의 파괴이자 제2의 도약을 알리는 포효였다.
그렇게 35명의 연구인력들이 대거 물갈이됐고, 국내 내로라하는 삼성 출신의 휴대폰 전문가들이 박전만 사장의 우군으로 나섰다.
박 사장은 1997년부터 2009년까지 13년간 삼성전자에서 애니콜 신화를 일궈낸 역군 중 한 명이다.
그가 쓸어져 가는 디지털큐브의 새 사령탑으로 부임할 것이란 소문이 떠돌자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도대체 디지털큐브가 뭐 하는 회사냐”라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증권가의 정보지인 이른바 '찌라시'에도 그의 이름 세 글자가 연일 거론됐다.
아이스테이션 구원투수로 나선 ‘삼성맨’ 박전만 사장이 제일 처음 꺼내든 메스는 무엇이었을까. 또 잘 나가던 대기업 임원이 국내 중소기업 수장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치뤄야 했던 고초는 또 어땠을까?
박전만 사장은 주마등처럼 스쳐간 지난 3개월간의 회고를 9일 아이스테이션 사옥에서 만난 기자에게 모두 솔직하게 털어놨다.
■삼성 고위 임직원, 왜 중소기업 택했나?
“삼성전자 고참상무가 나와서 대기업으로 가면 또 그 정도의 레벨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좀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은 중소기업이 아니겠어요. 백지 위에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옆구리 쿡 질렀던 여성IT벤처협회 협회장도 “네가 가서 살려야 하는 회사가 있다. 한번 가보라”고 했단다.
“생각보단 더 심각하더라고” 박사장은 부임 전 청진기로 진단하듯 아이스테이션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실제 와보니 아이스테이션 증상은 3기로 접어든 암환자와도 다를 바 없었단다. 메스를 갖다 된 환부는 기술기업의 심장인 연구소.
“핸드폰을 다루던 눈으로 PMP를 보니 기술수준이 상당히 낙후돼 있었어요. 아이스테이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회사 제품이 그랬죠. 대략 10년 전 기술수준에서 정체돼 있었어요”
무엇보다 텔슨과 합병한 시너지가 전혀 발휘되지 않았다. “제품 생산방식이 이전 디지털큐브 수준으로 하고 있더군요” 때문에 박 사장은 화성에 있는 디지털큐브 공장을 텔슨과 접목하는 1단계 작업에 착수한다.
엔지니어들의 기술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액션과 더불어 조직의 통폐합을 시도해 연구인력을 전략마케팅 조직으로 전진 배치, 해외수출시장의 물꼬를 트는데 앞장서게 했다.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PMP를 만들었고, 역사도 꽤 되니까. 사용자들이 이젠 삼성전자 휴대폰 수준의 품질을 요구하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죠. 선두업체가 마땅히 쥐고 갈 책임이자 말 못할 고초겠죠”

■애니콜 신화 주역, 휴대폰과 겨루다
기구한 팔자다. 휴대폰을 애지중지 하던 사람이 이젠 휴대폰과 애증의 관계가 됐다. 하반기 PMP시장에 가장 위협적인 요인으로 내달 출시될 아이폰이 강하게 거론된 탓이다.
박 사장의 표정엔 긴장감이 역력하다. 부임 전 예상치 못했던 암초다. 하지만 이해가 안됐다. ‘휴대폰도 아닌데 왜 PMP시장에 위협이 된다는 거죠?’
“한국사람들은 스마트폰에 대한 저항이 있는 편이죠. SK텔레콤, KT 등의 이동통신사업자가 서비스를 다른 나라에 비해 잘 구축해뒀거든요. 이메일 인터넷 브라우징 외에 사업자 서비스를 제대로 접할 수 없는 스마트폰은 국내 휴대폰 시장에 큰 영향을 주긴 어렵다고 봐요”
삼성 햅틱 휴대폰이 인터넷쇼핑몰이나 대리점에서 1만원에 거래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폰의 경우 사업자 보조금을 더해도 16기가바이트(GB)가 25만원, 32GB가 35만원 선에 측정될 것으로 보여 진다. 아이폰 잠재구매자들도 가격경쟁력 측면에선 한국산 휴대폰을 최종적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다.
“아이폰이 나오면 기존 휴대폰을 교체하겠다는 설문응답자가 60%나 나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이죠. 가격에 대한 이슈 앞에선 결과는 또 다르더군요. 문제는 아이폰이 단지 전화를 거는 핸드폰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의 말을 빌리면 아이폰의 무궁무진한 애플리케이션, 와이파이를 통한 값싼 인터넷 브라우징 등의 활용이 결국 PMP 시장을 잠식해 갈 것으로 분석했다.
아이폰 대항마로 아이스테이션이 기대를 건 제품은 3차원(D) PMP다.
“입체도형의 경우 초등학생에게 이해시켜 주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3D로 펼쳐서 보여주면 금방 이해합니다. 화학과목에서 유기화학 공식을 평면으로 그려주면 이해가 더 빨라요. 3D PMP로 교육용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에요”
하지만 박전만 사장은 전자사전은 철수키로 결심했다. 대신 PMP에 전자사전 콘텐츠를 모두 쏟아 넣기로 했다. 내비게이션 시장은 기존대로 가져갈 방침이다. 향후 아이스테이션 제품 판도가 크게 뒤바뀔 조짐이다.
“아이스테이션의 큰 물줄기는 ‘넷(Net) 디바이스’입니다. 넷북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제품으로 승부수를 놓을 거에요” 그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e북(전자책) 단말기로 이어졌다. 이전과 다른 ‘한방’을 날릴 뭔가가 있는 눈치였다.
■읽고 쓸 수 있는 ‘e북 2.0’시대 연다

“e북은 이미 선도를 삼성에게 뺏겼고, 해외에선 아마존이 이미 자리를 틀었으니 우리의 제품전략에도 차이가 있어야 되지 않겠나”
아이스테이션도 e북(전자책)단말기 개발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이 성숙된 내년 하반기께 진입을 목표로 두고 있다. 다만 이동통신업체와 국내 출판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선과제가 있다.
“아마존 성공은 미국 이동통신업체인 스프린트 덕이라 볼 수 있죠. ‘아미존 킨들 제품 개당 35달러를 줄 테니 콘텐츠 무한다운로드서비스 지원해 달라’고 해 스프린트 입장에선 유동성 확보, 아마존은 콘텐츠를 손쉽게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구축하는 윈-윈 모델을 만들었지만 국내에선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 사업자 저항이 좀 클 것 같아요”
하드웨어에선 차별화된 기기를 내놓을 계획이다.
예컨대 e북의 느린 화면전환 속도나 흑백 디스플레이만 지원되는 지금보단 더욱 개량된 플렉서블 디스플레이를 채용한다는 계획이다.
“쉽게 구부릴 수 있는 26만 컬러 LCD를 넣을 계획이에요.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 빨간 줄 밑줄도 치고, 메모도 하고, 이런 기록들은 인터넷상에서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게 하죠. 학교에선 학생들간의 정보격차를 줄일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고, 그러면 고액 과외도 사라지겠죠”
■쯧쯧, 이러니깐 중견기업이 없지”
박전만 사장은 대기업엔 관대하고, 중소기업에겐 차가운 정부정책에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지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우리나라에 중소기업은 많지만 중견기업이 없는 문제점에 대해 이렇게 풀이했다.
“중견기업으로 가길 모두 꺼려하죠. 중소기업을 졸업하면 정부의 지원이 한 번에 다 끊어지니까 중소기업들이 회사가 좀 클만하면 쪼개고 또 쪼개고 해서 중소기업 규모를 유지하려 해요. 이런 악순환이 계속 번복되는 것이죠”
때문에 박전만 사장은 기업의 상황에 맞는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견해다. 홀로서기도 중요하지만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체질에 맞는 정부지원책이 차등적으로 이뤄져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경제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대만이 가장 부러워하는 나라는 한국이다.
대만의 경우 전체기업의 97%가 중소기업이다. 이들이 전체 수출의 51%를 맡고 있다. 매출액 10억 원대인 대만 중소기업 7만 개를 모두 합쳐도 삼성전자 한 회사의 매출액 수준밖에 안되는 상황이다. 때문에 글로벌 시대 외국기업에 맞설 수 있는 대기업이 절실히 필요하단 얘기다.
선진국의 대기업 수는 우리나라보다 무려 3배나 많기 때문에 이들과 경쟁하려면 지금의 중견기업을 대기업으로 육성해가야 한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이론이다.
두 번째는 기술보단 담보가 우선된 벤처의 현실이다.
“미국 같은 경우 벤처기업은 기술이 있는 사람이 창업을 하는 데 우리는 담보가 있는 사람이 창업을 합니다. 기술이 좋다고 해도 일체 돈을 끌어올 방법이 없어요”
아울러 기술시장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실패를 보더라도 미국은 유한책임인데 우리나라는 반대로 무한책임이에요. 어디 뭐 ‘한방에 훅 간다’란 말 있잖아요…안타깝지 뭐”
■2시엔 신문, 4시엔 우유배달원
박전만 사장이 3개월간 철야근무로 지어진 별명은 배달원이다.
“2시에 들어갈 땐 조간신문을, 새벽 4시에 들어갈 땐 우유를 들고 들어가다 보니 와이프가 지어준 별명이에요” 직원들이 밤을 샐 때면 결코 혼자 집에 들어가는 경우가 없다는 박사장. 대기업을 뒤로 하고, 중소기업행을 택한 그에게 이곳에서 최종의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최종의 목적지라면 제 2의 삼성전자겠죠. 그만큼 좀더 커진 회사요. 2015년 1조 매출 계획을 우선 세워뒀어요”
아이스테이션은 엄격한 품질기준을 적용, 내달 HD영상을 지원하는 PMP 'T9'과 내년엔 3D PMP 등을 순차적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또 GSM WLL폰과 CDMA 450MHz 휴대폰으로 러시아·동유럽·중남미·아프리카 등의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체코 모빌콤과 텔슨 단말기 300만 달러 수출 계약을 한 데 이어 베트남에 GSM WLL폰 630만 달러 규모 수출 계약을 체결했죠.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들은 이 시장에서 마진을 남기기 어렵지만 아이스테이션 규모의 회사는 충분히 이윤을 남길 수 있거든요. 국내기업들과 충돌하지 않는 블루오션에서 캐시카우를 만들어 갈 거에요”

디지털큐브에서 아이스테이션으로 사명을 바꾼 이유를 끝으로 물었다. “시대가 달라졌죠. 지금은 네트워크 시대지 디지털시대는 아니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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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 화두가 되던 시대는 15~20년 전이라고 말한 박 사장은 상상(imagination)에서 제품을 혁신(innovation)해 소비자에게 제대로 된 정보(information)를 제공하자는 뜻에서 아이스테이션에 ‘아이(i)’를 강조한 사명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단다.
“아이스테이션에서 ‘아이’는 제일 밑바탕의 상상력을 말하죠. 지인들이 우스개 소리로 ‘아이스테이션에서 그러면 ‘어른’스테이션은 언제 되냐’라고 간혹 물어오시는데 글쎄요, 저는 영원히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이스테이션으로 남았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