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에 위기론이 팽배하다. 세계 경제 침체로 지난 40년간의 고도 성장에 언제부터인가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고용 불안도 확대일로다. 성장은 해도 고용이 늘지 않는 이른바 고용없는 성장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뿌리가 깊어만 가는 양극화는 대한민국을 '불안사회'로 이끌고 있다. 계층, 세대간 갈등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세계 경제 위기가 덮치면서 한국이 주특기로 내걸었던 제조업과 대기업 중심의 수출기반 경제는 지금의 한국 경제가 당면한 모순들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란 지적이다.
그래서다. 한국경제를 고용과 성장이 함께가는 체질로 바꿀 수 있는 특단의 승부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드웨어의 바통을 이어받을 또 하나의 에이스를 키워 한국 경제를 원톱에서 투톱 시스템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에서 하드웨어와 투톱을 이룰 유력 후보로는 단연 소프트웨어(SW) 및 지식 기반 IT서비스가 꼽힌다. 고용 문제 해결이든, 한국이 강점을 지닌 제조업 경쟁력 강화든, 나아가 국가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든 SW와 지식 기반 IT서비스는 분위기 반전의 확률높은 승부수로 떠올라 있다.
■ 왜 SW와 서비스 경제로의 전환인가?
한국 경제는 지난 40년간 대기업과 제조업이 주도한 수출 중심 체제였다. 이를 기반으로 한국은 고도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고, 꿈만 같았던 12위 경제대국 반열에도 올라설 수 있었다. 철강, 자동차, 반도체, 조선, 휴대폰, 디스플레이이 분야는 이미 세계 정상급이다. 80년대까지는 고용시장도 '완전고용'에 가까웠다.
그러나 90년대말 IMF 위기를 겪고난 뒤, 대기업과 제조업 중심 구조가 제공한 풍요로움은 더 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고 있다. 대기업들은 후발 국가들의 추격에 따른 가격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해외로 공장을 대거 이전했고 '글로벌 아웃소싱'이란 이름아래 해외 현지 조달도 늘렸다.
이같은 상황은 국내 중소기업들의 생존 기반 약화로 이어졌다. 대기업 성장이 중소기업의 동반 성장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고용 불안은 가중됐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는 양상이다.
스타 벤처기업가 출신인 안철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대기업 중심 구조로 가도 잘먹고 잘사는 나라도 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대기업 중심 구조는 매우 위험하다. 대기업 고용 능력이 점점 줄고 있다면서 결국 한국의 경우 국민들을 먹여살리는 것은 2천만명을 고용하는 중소기업들이라고 강조한다.
중소기업이 무너지면 대기업도 위험해지며, 지금 한국은 그럴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게 안 교수의 지론이다. 안 교수가 끊임없이 중소벤처 육성을 부르짖는 이유다. 그는 중소 벤처와 대기업은 서로를 도울 부분이 많다. 전세계 혁신 기업중 90% 이상이 중소기업에서 나오고 있다면서 중소기업이 잘되야 대기업도 경쟁력이 생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소기업 육성에 SW와 지식 기반 서비스 경제가 전략적 요충지임을 부정하는 이는 드물다. SW는 대표적인 지식서비스 산업으로 분류된다. 소비자 요구가 다양해지고 있는 만큼, 시장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이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진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SW산업의 부가가치율은 69.6%로, 서비스업 평균 51.5%보다 높다. 28.8%인 제조업을 압도한다. 매출 10억원당 고용창출효과도 크다. SW산업은 6.4명인 반면 제조업은 0.9명에 그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를 봐도 제조업이 매출 10억원당 2.05명을 고용하는데 비해 SW산업은 무려 24.4명에 이른다.
지난해 비슷한 규모의 매출을 올렸던 삼성전자와 미국 IBM을 비교해 봐도 SW가 일으키는 고용 효과를 체감할 수 있다. 제조에 집중하는 삼성전자는 직원이 17만명인데 비해, IT서비스·컨설팅 등 서비스사업 중심의 IBM은 직원수가 36만명에 이른다.
SW의 고용효과는 토목경제도 압도한다. 통계청 고용 동향자료를 보면, 지난 4월 건설업 취업자수는 177만3천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12만8천명 줄었다. 취업자 감소율은 지난 2월 1%에서 3월 3.9%, 4월에는 6.7%로 확대됐다. 정부가 건설에 지출을 늘리고 있음에도 고용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안 교수는 SW가 어떻게 보면 토목과 건설보다도 노동집약적이다. 건설은 인력만 필요한게 아니라 원자재도 필요하다. 사람이 차지하는 인건비는 일부다. 그러나 SW는 대부분 인건비다. 조금만 더 활성화되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국가와 가정에서 많은 교육비를 들여 키워놓은 수많은 대졸 인력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SW시장 규모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미국 시장조사업체인 IDC에 따르면 지난 2007년 IT서비스를 포함한 세계 SW시장 규모는7,200억달러로 한국의 대표 수출 품목인 반도체(2,400억 달러)의 3배에 달했다.
■ 하드웨어 시장도 SW 전성시대
SW 산업 육성의 효과는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에 따른 고용 확대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이 주특기로 갖고 있는 제조업 경쟁력도 SW로 인해 덩달아 올라갈 수 있다.
바야흐로 지금은 융합의 시대다. SW와 제조업, SW와 서비스간 융합을 통해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서비스 시장을 창출하는 융합 열풍이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에 따라 SW가 하드웨어 부가가치를 주도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권력은 SW로 넘어갔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휴대폰, 자동차 분야는 이미 SW시대가 개막됐다. SW를 보고 하드웨어를 구입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휴대폰은 가히 'SW 열풍'이다.
애플은 '3G 아이폰'과 아이폰 애플리케이션을 사고팔 수 있는 온라인 마켓플레이스 '앱스토어'를 '원투펀치'로 내세워 SW중심의 휴대폰시장 구조를 탄생시켰다. 몇년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나리오다.
애플이 던진 변화의 파괴력은 컸다. 앱스토어는 지금까지 다운로드수가 10억회를 넘었고, 애플리케이션도 4만개를 돌파했다. 이를 기반으로 애플은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단숨에 강자로 뛰어올랐다.
앱스토어에 올라오는 애플리케이션이 늘어날수록 아이폰 판매도 늘어난다. 아이폰 판매가 늘면 개발자들의 애플리케이션 개발 의욕도 높아지고, 이것이 다시 소비자들의 아이폰 구매파워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선순환 구조다. 애플이 SW로 만든 휴대폰 시장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다.
애플표 아이폰 드라마가 세기의 흥행을 터뜨리자, 이를 모방한 듯한 서비스들도 쏟아지고 있다. 노키아, 삼성전자,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이름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글로벌 IT업체들이 앱스토어와 유사한 서비스를 선보였다. 이제 휴대폰은 SW를 빼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SW가 있어야 하드웨어도 힘을 쓸 수 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한국SW진흥원이 발간한 2008년 SW산업백서에 따르면 자동차에서 SW개발원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2년 37.9%에서 2006년 52.4%로 비중이 늘어났다.
독일 자동차업체 BMW에 따르면 2만5,000여개의 부품이 들어가는 자동차 제조에서 혁신의 90%는 SW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자동차를 플랫폼으로하는 SW 시장도 확산되고 있다. 자동차와 SW업체간 합종연횡도 급물살을 타는 분위기다.
반도체 시장도 SW영향권에 들어섰다. 세계 최대 반도체업체 인텔은 모바일 시장에서 지분을 확대하기 위해 SW를 전진배치하기 시작했다. 폴 오텔리니 인텔 CEO는 최근 투자자들을 상대로 SW는 이제 인텔의 핵심 경쟁력이 됐다고 선언했다.
신규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SW의 전략적 가치가 매우 커졌다는 얘기였다. 인텔은 지금 리눅스 기반 '모블린 OS' 프로젝트를 앞세워 넷북과 스마트폰 시장을 노리고 있다. 혈맹관계인 마이크로소프트(MS)와 경쟁도 피하지 않겠다는 모습이다.
한국 경제 시스템의 원톱으로 활약했던 하드웨어는 이제 SW 도움없이는 골을 넣기가 쉽지 않게 됐다.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고건 교수는 SW는 IT산업 뿐만 아니라 건설, 자동차, 항공기, 조선, 의료 등 모든 분야에서 차별화를 꾀할 수 있는 핵심 요소라며 한국은 휴대폰·자동차 등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그안에 탑재되는 SW는 대부분 외산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드웨어 산업을 위해서라도 SW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그린(Green) 분야에서도 SW의 성장 잠재력은 높다. 글로벌 SW업체는 이미 그린 시장 공략을 위해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세계 최대 비즈니스 애플리케이션 업체 SAP의 레오 아포테커 CEO는 기업들이 탄소 배출, 수질 관리, 에너지 사용 등 환경 요소에 대한 통찰력을 갖는 것은 대세라며 이는 회사의 효율, 경쟁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의 '에이스'로 통하는 휴대폰, 자동차, 반도체 분야에서 SW파워는 계속 커지고 있다. 이제 하드웨어와 SW는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하드웨어와 SW간 투톱 체제는 한국경제 부활을 위한 필승카드로 급부상중이다.
정부도 상황 파악은 하고 있다. 부족하지만 융합 시대를 주도할 수 있는 SW지원 정책을 내놓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IT서비스와 SW는 핵심 기술이 성숙돼 있는 만큼, 따라갈 여지가 다소 남아 있고 융합과 관련한 표준도 아직 초보단계다.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험을 걸어볼만 하다.
박대연 티맥스소프트 회장은 1조3,000억달러에 이르는 SW, IT서비스, 디지털콘텐츠 등 세계 SW관련 시장에서 우리가 10%만 점유하더라도 국내 산업구도 변화는 물론 전 산업 분야 경쟁력이 업그레이드될 것이라며 1인당 GNP 4만달러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에 대해 회의론도 적지 않다. 이미 국내 SW업계의 체력이 바닥상태인데, 지금 밀어준다고 해서 국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다. 지난 2007년 기준으로 국내 SW시장 규모는 174억 달러에 그쳤다. 세계시장의 1.8%밖에 안된다. 바닥권이다. 회의론은 이같은 상황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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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SW와 지식 기반 서비스 경제 육성은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어렵지만 가야할 '외길 희망'이라는 것이다.
KAIST 김진형 교수는 정부가 SW산업에 갖고 있는 뜨거운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상황이 너무 나쁘다면서 통신 등 IT인프라와 관련된 네트워크 산업 육성이 1막이었다면 1막은 이제 끝이 났다. SW중심으로 2막을 열어가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