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염두에 없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만 급급해 하던 냉혹한 변호사가 대주교의 살인죄로 기소된 피고인의 변호를 맡게 된다. 헌데 그 피고인은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으리라고는 상상이 안 되는 연약하고 순수한 소년이다.
사건의 실체와 소년의 비밀을 파헤쳐가던 변호사는 그 소년이 깊은 상처로 인해 다중인격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대주교를 살해했음을 알게 된다. 소년의 비극적인 사연에 가슴 아파하던 변호사는 평소의 속물적인 자세를 버리고 간만에 진심을 가지고 변호에 나선다.
결국 법정에서 극적인 변론을 통해 그가 다중인격을 가진 환자임을 증명해냄으로써 소년의 무죄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는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이 소년의 계략에 의한 거짓이었음이 밝혀지면서 경악과 공포로 바뀐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인 리처드 기어(Richard Gere)와 에드워드 노튼(Edward Norton)이 출연한 헐리우드 영화,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이다. 에드워드 노튼이 순진무구한 천사와 무시무시한 악마의 모습을 마음대로 바꾸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는 찬사를 받은 영화이다.
이 영화가 나오기 전에 우연히 그 원작 소설을 먼저 접했는데, 글이 가지는 풍부한 묘사에다 나의 상상력이 결합되어서 그런지 영화를 능가하는 엄청난 감흥을 경험한 바 있다. 특히 소년을 구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는 변호사의 면전에서 자유자재로 원래의 모습에서 자신이 가장하였던 다른 인격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바꿔가며 자신의 승리를 뽐내고 변호사를 조롱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는 생각보다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다루어져왔다. 수개의 다중인격들이 서로를 제거하는 이야기를 묘한 분위기로 묘사한 ‘아이덴티티’라는 흥미로운 영화가 몇 년 전에 소개된 바 있고, 그밖에 ‘칼라 오브 나이트’,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 등도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를 다룬 영화들이다. 소설로는 유명한 고전인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내면의 선과 악을 분리하는데 성공한 지킬박사가 나중에는 더 이상 하이드를 통제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는 비극인데 이 역시 분리된 인격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의학적으로 해리성 정체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로 불린다는 다중인격이 영화나 소설에서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우선 소재 자체가 흥미를 끌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내면에 대조적인 인격이 들어앉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르는 이야기는 선악의 대립이라는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플롯을 끌어낼 수 있다.
게다가 납득하기 어려운 황당한 이야기를 막 풀어놓고는 나중에 다중인격자의 행위로 대충 설명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니 호기심을 자극하고자 하는 영화의 소재로는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다. 하도 써먹으니 이를 역으로 이용한 것이 ‘프라이멀 피어’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흥미 있을지 몰라도 만약 실제로 이런 사례를 접하게 된다면 영 난감할 수밖에 없다. 경악스러운 것을 떠나 한 인격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여러 인격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 통해 드러나는 다중인격 성향
이러한 당혹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일까, 과장이긴 하겠지만 인터넷 시대에 들어와서 종종 다중인격이 거론되곤 한다. 악성 비방글이나 이른바 악플과 같은 비정상적이고 반사회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사람들의 행동이 다중인격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평상시의 오프라인에서는 내성적이고 순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는 대응이 불가능할 정도의 공격성과 비이성적인 행동양태를 보이는 경우를 자주 접하다 보면 정말 전혀 다른 인격이 동일인에게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일응 이해가 간다.
사실 한 인격을 명확한 하나의 정체성으로 파악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만만치 않은 반론이 있다. 일관된 정체성과 투명한 합리성을 갖는 인격체는 환상에 불과하며, 분열적이고 복잡한 인간이 많아지는 것을 원치 않은 현대 산업사회의 필요에 의하여 강요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의 가상현실과 사이버 공간은 인격의 원래 모습인 분열적 본성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기여하고 이에 따라 다중인격의 멀티태스킹이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은 굳이 MUD(Multiple User Dungeon)나 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등과 같은 온라인 게임에서 새로운 역할에 심취하고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나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에서 말 그대로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은밀한 채팅에서 발견하게 되는 의외의 모습들이나 꼭꼭 숨겨왔던 취향을 과감하게 드러내며 같은 취향을 가진 자들과 함께 하려는 많은 사례들에서 충분히 확인해 볼 수 있다.
인터넷 다중인격에 의한 '긍정 효과'
그렇다면 인터넷 시대의 그러한 유사(類似) 다중인격적인 현상도 영화에서처럼 단순한 악성의 발현, 또는 쓸데없거나 몹쓸 짓의 원인 내지 핑계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인터넷이 등장한 이래 이와 같은 다중인격적인 멀티태스킹이 가지는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개방적 네트워크가 가져온 획일성의 타파와 다양성의 증대는 개인의 긍정적인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와 기회로 작용함을 볼 수 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을 계속 실험하고 검증하면서 다양한 개인과 집단의 교류를 통해 공감을 찾아가며 자신의 새로운 변신을 모색해 가는 다중성의 추구는 네트워크가 가져다 준 소중한 가능성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부작용은 있을지언정 병리적인 장애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장애는 변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병리적인 강박증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 우리는 그의 의도와 진심을 의심한다.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어느 직역에서 한참 잘 나가던 사람이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엉뚱한 분야에 투신을 하였을 때 우리는 호기심을 가지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비웃는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사람이 보여준 그 새로운 모습이 원래 그의 유일한 진짜 모습이었다고 낙인을 찍어버려 그로 하여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한다.
상업적인 노래로 성공한 어느 뮤지션이 군부독재의 부당한 정치적 탄압에 비분강개하여 자신의 소감을 담은 몇 곡을 발표한다. 곧 그는 이른바 저항 가수의 대명사로 떠오르고 민중의 영웅이 된다. 그 후 모든 이들은 그에게 의미 있는 행동만을 요구한다. 원래의 상업적인 곡을 부르지도 못하게 하고 일상에서도 모범적인 생활만을 기대하고 이에 어긋나면 많은 실망과 비난을 가한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그는 모든 이들을 원망하며 자살을 한다.
학생시절에 읽었던 어느 단편소설의 내용이다. 만약 위 가수가 그러한 결말을 알았더라면 그는 결코 그 저항가요를 절대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의 변신을 절대로 볼 수 없었고 그의 변신이 가져다 준 작은 가능성조차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업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그의 속물적인 정체성과 불의에 비분강개하는 그의 이상적인 정체성은 모두 동일한 그에게 속한 모습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의 다중인격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네트워크 시대의 진정한 주인공들은 네트워크 안에서 다양한 집단과 관련을 맺지만 결코 어느 한 집단에 종속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다중인격적인 개인이다. 그들의 다중인격성은 경악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과 에너지의 원천이며 네트워크가 가져다 준 기회의 상징이다. 하지만 변신과 다양성에 대한 우리들의 너그러움과 장려가 없이는 그토록 무한한 가능성과 에너지도 한낱 음침한 병리적인 현상에 그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롭게 변신하라. 결코 여자의 변신만이 무죄가 아니다.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