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을 찾아보면 ‘조로’란 단어는 2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조로(朝露) : ‘아침이슬’조로(早老) : ‘빨리 늙음’두 단어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모두 IT업계의 종사자들과 묘한 관련성을 갖는다. 앞의 ‘아침이슬’이란 뜻은 ‘아침에 스러지는 이슬’이란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고 뒤의 ‘빨리 늙음’은 말 그대로 정상적인 노화보다 더 빠르게 늙는다는 것을 뜻한다.주변의 지인(知人)이 오래 전 미국에 다녀와서 들려줬던 얘기가 생각난다. 항공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그는 세계 굴지의 항공사인 미국 보잉사에 연수를 가게 됐다. 그는 한국과 같이 젊고 스마트한 화이트 컬러의 엔지니어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백발이 성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귀에 연필을 꽂고 청바지를 입고 느긋하게 일하고 있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나이를 먹어서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고 동시에 젊은 후진들을 양성하며 회사의 주요한 인재로 남을 수 있는 모습에 부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이 근무하는 곳의 엔지니어는 젊은 사람들뿐이었으며 항공기 엔지니어도 최첨단 직종이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본인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모습이었다고 그는 말했다.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지, 뭐 대단한 일이라고…’하고 넘어갔었나 보다. 그런 얘기가 다시 생각나는 걸 보니 필자도 어떤 위기의식을 갖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공통점과 함께 서로 다른 차별점을 가지고 있고, 그 차별성에 의해 어떤 인상을 받게 된다. 업무로 만나는 사람들의 차별성 기준 가운데 하나가 ‘직급’이다.비슷한 경력에 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기업이나 비 IT업계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높은 직급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대기업에서 대리나 과장 직급과 비슷한 연배, 경력을 가진 벤처 종사자들이 과장이나 부장, 이사 직급을 달고 있는 것은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다.이와 같은 상황이 생기는 이유는 벤처 기업의 특성상 성과에 대한 보상이 빨리 주어지기 때문에 인사 평가가 즉각 반영되는 것도 있으며 비슷한 연배와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억지로라도 그들에게 계급을 부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복리후생이나 급여 대신 높은 직급으로 보상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다.대리로 1년을 근무하다가 경쟁사로 옮기면서 과장으로 승진하거나 하는 일은 실제로 상당히 많다.사실 직장생활을 하는 직장인으로서 직급이나 승진이라는 단어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직급에 욕심을 내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 IT 기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높은 직급을 부여받게 됐으며 스스로에게도 위안이 됨과 동시에 경력 관리에도 큰 보탬이 됐다.이처럼 상대적인 만족감을 느끼는 이들은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이사 직급을 대기업이나 비IT기업에 비해 더 빠르게, 거부감 없이 밟아 나아가고 있다.필자 또한 그 시류에 편승하면서 ‘승진’이라는 단어가 직장생활의 큰 동기부여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들이 점차 승진 연한을 늦추는 것을 보며 이 시점에 뭔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빨라지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 하는 불안함도 엄습해 온다.아직 한창 실무를 해야 할 30대 후반에 남들보다 빨리 승진해서 이사를 달았다고 하면, 이사로 20년을 더 직장생활 하기도 어려울 텐데 그만큼 더 빨리 내몰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주변을 둘러봐도 너무 이른 시기에 팀장이란 직급을 달고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팀원을 비롯한 조직을 이끌 준비가 안됐음은 물론 자신의 업무에 대해서도 정통하지 못한 채 승진하게 돼 조직에서 불협화음을 내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런 불협화음은 자신이 속한 조직을 벗어나 외부 업체와의 업무 조율에서도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임원이 일반 직원들처럼 꼼꼼히 세부 업무를 챙기는 경우도 그렇다. 불과 얼마 전까지 실무 담당을 책임지던 직원이 갑자기 간부직원이나 임원이 되는 경우 실무 능력을 갖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다른 직원들의 업무에 100% 만족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사사건건 작은 일에 이르게까지 챙기고 싶어하는 습성이 생긴다. 임원이 된다는 것은 회사와 사업의 전체적인 흐름을 지휘해야 하는 위치가 됐다는 것이며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실무는 물론이거니와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 사람에 대한 신뢰, 사소한 실수나 손해의 감수, 리더쉽, 다른 회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보다 완성도 높은 구성원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안타깝게도 IT 벤처 기업의 경우에는 충분한 역량을 가지지 못한 채 조직의 리더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아직 준비가 안된 리더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승진연한이 아니라 그 직급에 맞는 업무 능력과 리더십 등을 갖추는 일이다.설령 너무 빠르게 직급이 되더라도 그 자신이 이미 준비가 된 상태라면 문제될 것은 없다. 빨리 승진하는 것만큼 남들보다 많이 노력하고, 많이 배우고, 또 가르치면서 자신의 내공을 쌓아가면 되는 것이다.마찬가지로 조기 승진을 한다고 무조건 조로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만큼 더 빨리, 더 많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얘기도 된다.그러나 우리 산업구조가 갑자기 바뀌지 않는 한 IT 업계의 조로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무조건 대기업과 같이 승진연한을 늦추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에서 피해갈 수 없는 IT업계의 조로에 대해 맞부딪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고, 그것이 업계의 인적 자원은 조로하더라도 자신은 끝까지 남아 IT의 로맨스 그레이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 IT 산업 구조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나 자신을 지키고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올해 당장 진급이 안됐다고 좌절하는 것보다 긴 안목으로 자기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여가는 장기적인 자기 투자와 관리가 필요한 때다.여담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멋진 쾌걸 ‘조로’는 아쉽게도 국어사전에 나와있지 않았다.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