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컴퓨터 조현정 사장「기술력 없는 벤처는 로또다」

일반입력 :2004/11/26 09:58

정선구 기자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서울 충무로에서 전파사 기술자 생활을 했던 그가 생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술력 때문이었다. "겸손 떤다며 주저하지 말고 '나의 좋은 기술을 적극 활용해 달라'고 떠들어야 한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다.조현정 사장은 부농(富農)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여섯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 말고 전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일류 기술자가 된 계기가 됐다. 유난히 손재주가 좋아 무엇이든 척척 고쳤다. 딱지치기 하는 또래와도 어울리지 않았다.71년 서울로 올라와서는 충무로 전파사에서 일했다. 이곳에서 그는 '업자 수리 전문가'가 됐다. 일반 기술자가 고치다 망가뜨린 것을 다시 완벽하게 고쳐주는 일이었다. 그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꼬마 기술자'. "기술자가 꿈이었는데, 10대 초반에 이미 유능한 기술자가 돼 버렸죠. 그래서 꿈을 업그레이드하기로 했습니다."그러고는 검정고시를 거쳐 용문고에 입학했다. 고교 시절에도 그의 기술력은 숨어 있지 않았다. 학교시설 수리는 그의 몫이었다. 부품 하나 고치는 데 3000원씩 돈도 받았다. "학생이라기보다 기술자였어요. 수리비로 받은 돈은 기술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죠."인하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해서도 돈벌이는 계속됐다. 꼬마 기술자로 알려진 그의 명성을 듣고 대학에서 고장난 방사능 측정기 수리를 맡겼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려운 작업처럼 보였다.하지만 회로를 하나씩 들여다보니 의외로 간단한 고장이었다. 콘덴서 하나가 문제였다. 갈아끼운 콘덴서 값은 단돈 100원이었다. 학교에선 난리가 났다. 당장 그에게 교수 방보다 더 큰 별도의 방이 제공됐다. 학교의 모든 제품 수리를 도맡았다. 학교에서 연간 450만원의 돈도 받았다. 당시 등록금이 학기당 60만원 할 때였다.대학 3학년을 마치고 학교에는 나가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받은 돈으로 회사를 차렸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은 서울 맘모스호텔 스위트룸으로 잡았다. 방값이 매우 비쌌지만 냉난방이 잘돼 하루 18시간 근무가 가능하고 잠도 잘 수 있어 일반 사무실보다 유리했다.호텔에서 사업하다 보니 소프트웨어를 사러 오는 병원 관계자들이 계약을 꺼리기도 했다. 호텔 방을 쓰고 있으니 돈 떼먹고 도망가는 사람으로 보기 일쑤였다. 그가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우수성을 안 병원들이 늘어나면서 이 같은 인식은 점차 없어졌다. 매달 진료환자들의 보험 청구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정리하던 병원 관계자들은 그 복잡한 업무를 소프트웨어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것에 놀라기 시작했다.사업이 잘돼 가자 86년에는 회사를 옮기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정보기술(IT) 회사들은 청계천, 여의도 등에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테헤란로를 선택했다. 주변에는 빌딩이 별로 없었고 비닐하우스. 폐차장 등이 즐비했지만 마침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고, 도로는 왕복 10차선으로 넓혀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 미래의 신사업군이 들어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후 수천개의 벤처가 몰린 테헤란 밸리 시대를 그가 연 셈이 됐다.그는 후배들에게 말한다. "요즘은 선배가 100을 노력할 때 200을 해야 할 너희는 50도 안 한다. 실력을 키우지 않고 한탕 하려는 '로또세대'다.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