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의 망치와 모루] CPU가 놀고 있다구요?

전문가 칼럼입력 :2002/04/24 00:00

김종원

밤늦게 집에 들어가려는데 현관문에 노란색 쪽지가 붙어 있었다. 가스 검침을 못했으니 사용량을 전화로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흠, 이번 달도 지난 달과 같음이야. 내 가스레인지는 라면 한 번 끓인 것이 전부. 뭐 자취하는 사람이 집에서 밥을 해먹겠어?집에서 사용하는 도시가스는 어디서 공급되는지는 모르지만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 LPG를 사용할 때는 가스가 떨어지면 배달을 시켜서 가스 탱크를 떼어낸 뒤 새 것으로 바꿔야 했지만, 이젠 끊임없이 가스를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비단 도시가스뿐 아니라 전기, 수도물 등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 사이에 묻혀서 우리를 엮어주고 있다.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어떻게 관리되는지도 모른다. 다만 밸브를 열고 가스를 사용하거나 수도꼭지를 틀어서 물을 사용하면 된다.도시가스를 사용하듯 컴퓨터 파워를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내 컴퓨터에서는 10시간이나 걸리는 애니메이션 렌더링 계산을 10초만에 할 수 있고, 그 사용금액이 매달 이메일로 날아오는 것을 상상해보자. 10초만에 할 수 있으려면 계산상으로 내가 가진 CPU와 동일한 컴퓨터가 최소한 3600대가 필요하다. 네트워크로 이 컴퓨터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내 컴퓨터가 초고속 인터넷에 연결돼 있고 MP3 파일 공유처럼 CPU를 공유한다면, 이런 공동 작업이 가능할 수 있다. 내 컴퓨터가 할 일을 수천 개의 작업으로 쪼개고 인터넷 상에 연결된 수천 개의 컴퓨터에 보내고 다시 처리 결과를 모으면 된다. 내 컴퓨터가 하는 일은 내가 필요로 하는 작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것뿐이다.이런 비슷한 일을 하는 곳 중에서 대표적인 곳이 NASA의 SETI@home 프로젝트(http://setiathome.ssl.berkeley.edu/)가 있다.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는 약자 그대로 외계의 생명체를 찾기 위해서 전파 망원경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이다. 가입자가 226개국의 368만 명에 이른다. 동시 사용자 50만 명에 평균 계산량이 초당 10조 회의 계산을 하게 되는데, 이는 95만 6000년(4월23일 현재) CPU 타임에 이르는 양이다. 이 작업은 분명히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계에서 가장 큰 분산 슈퍼컴퓨터가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약간 주제에서 벗어나서 초고속 인터넷 강국이라는 한국의 기여도를 찾아보았다. 한국은 368만 명의 가입자 중에서 0.3%를 차지하는 1만 2000명으로 226개국 중에서 34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은 5위, 멕시코는 33위다.)이렇게 여러 곳에 분산돼 있는 컴퓨터를 연결해서 하나의 시스템처럼 사용하는 것을 메타 컴퓨팅 또는 그리드(GRID)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드라는 말은 바둑판처럼 연결된 컴퓨터를 지칭하는 말로 컴퓨터를 묶어서 처리하는 클러스터링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이런 방식으로 인터넷이 아니라 초당 수 기가바이트를 전송할 수 있는 광케이블로 연결돼 동작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저가의 컴퓨터로 슈퍼 컴퓨터 이상의 성능을 낼 수 있기 때문에 IBM이나 HP, 썬과 같은 회사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기술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그리드 프로젝트 중 하나인 글로버스(Globus, http://www.globus.org/)는 IBM의 지원 하에 크게 알려졌다. 글로버스는 아르곤(Argonne) 국립연구소, 남가주대, 시카고 대학 등에 있는 연구원들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최근 글로버스는 OGSA(Open Grid Services Architecture)를 수용한 버전을 내놓을 것이라고 하였다. OGSA는 그리드와 웹서비스 개념을 통합해서 그리드 시스템 아키텍처로 진화시키려고 하는 구조인 것이다. 현재의 웹서비스를 그리드 시스템을 통해서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검색엔진이나 FTP 다운로드 서비스같은 것을 공유된 컴퓨터들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리드 시스템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할 것 같다. 한 가지는 초고속 광케이블로 연결된 특정 지역이나 한 국가 내의 슈퍼 컴퓨터들을 연결하는 슈퍼 컴퓨터 클러스터링이다. 또 하나는 인터넷 망에 연결된 개인 사용자들의 컴퓨터를 연결해서 컴퓨팅 파워를 뽑아내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이다. 개인용 컴퓨터를 연결하는 것은 P2P 서비스의 확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파일 공유가 아니라 CPU 공유를 의미하는 것은 놀고 있는 CPU에게 일을 시킨다거나 커다란 계산 일을 단순히 나눠서 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누구나 슈퍼 컴퓨터를 책상 위 계산기 사용하듯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엄청난 계산을 해야만 해독할 수 있는 은행 계좌 연결 암호 해독같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누구나 엄청난 컴퓨팅 파워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 악용되면 핵폭탄 개발이나 암호 해독과 같은 곳에 쓰일 수 있지만, 하룻밤 작업으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를 한 편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인터넷 상의 기술 발전은 광속보다 빠르다. 이미 본인도 모르게 스파이웨어 프로그램이 설치돼 암호 해독에 일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을 컴퓨터가 반짝이며 움직이고 있다면 한 번 의심을 해보기 바란다. 컴퓨터는 꿈을 꾸지 않으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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