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TV 프로그램중의 하나는 '마징가'였을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 TV가 있는 집에 놀러 가서 저녁을 먹으러 오지않는 필자를 찾아 몇 번이고 데리러 오셨다는 말을 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다. 친구들끼리 서로를 장난스럽게 '김 박사', '강 박사'라고 불렀고, '마징가'나 '태권브이'같은 로봇을 꿈꾸면서 '지구는 우리가 지킨다'라는 말도 많이 했던 것 같다.얼마전 한 일간지 사이트에 '대덕의 박사 아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빠, 자꾸 그러면 나 이과 갈거야'라는 말이었다. 2002년 대학입시 수험생들의 계열별 지원 결과를 보면, 자연계 27%, 인문계 56%, 예체능계 17%로 자연계가 인문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문과가 5반, 이과 7반일 정도로 이과가 훨씬 많았고, 게다가 의대 계열이 아닌 순수학문적 욕심으로 과학고등학교나 과학기술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언제부터인가 자연계를 선택하는 것은 의대 계열을 가기 위한 수단으로 바뀐 것 같다. 왜 이렇게 됐을까?IT 업종을 보면, '인문계'를 나와서 IT쪽 공부를 해서 성공한 사람들도 있지만 실무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의 상당 부분은 '이공계' 출신이다. 한때 '김 박사', '이 박사'라고 불렸던 사람들도 있고, '공학 박사'를 꿈꾸며 '공대'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있다. '대덕 연구원'들의 넋두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기초 학문이나 기술의 황폐화는 진행된지 한참이 지났다. 능력있는 사람들은 외국으로 나가거나 벤처 붐을 타고 대덕을 떠나 창업의 대열에 끼어들어 연구가 아닌 사업에 열중하고 있다.비단 공학이나 기초과학 분야가 아닌 IT 업종에 종사하던 이공계 출신들도 닷컴 신화 몰락 이전부터 해외 취업이나 금융관련 직종, 각종 전문직 고시, MBA 관련 유학을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하물며 인문학이나 사회학, 기초 철학 계통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분야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생계조차 막막한 지경이다.도대체 무엇이 과학 강국을 외치며 많은 사람들을 이공계로 몰아넣고는 결국 십수 년 동안 쌓아온 전문 분야를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는가?여러 가지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 근시안적인 교육정책과 전문인력 양성 계획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지금 당장 부족한 인력을 해소하기 위해서 학과를 신설하고 교육과정을 만든다고 해서 실제 졸업생이 배출되는 시점에 실제로 그만큼의 인력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시간이 약 3∼5년 정도 지나면 부족한 인력은 어느 정도 해소되고, 인력 수요는 다른 분야로 전환하는 시점이다. 90년대 초에 계속 늘어난 공대생은 이미 포화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처럼 공대생 배출이 줄어들고 있다면 다시 공대생이 부족한 때가 도래할 것이다. 인력이 부족하면 사회적 대우는 높아지게 마련이다.두번째는 전문인력에 대한 정원 제한이다. IMF 이후 평생직장 개념도 무너지고, 대기업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 살게 됐음에도 의사나 변호사, 약사와 같은 전문직은 공공 서비스라는 측면 때문에 자신들의 시장이 위협받지 않게 만들면서 자율 경쟁 대신 안정적인 경쟁 구조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러한 구조가 계속되는 한 이러한 직종의 자격증을 얻는 것은 안정된 수입원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수입까지 다른 직업에 비해 높은데 어느 사람이 마다할까? 심도 깊은 개혁이 선행되지 않는 한 이러한 안정성은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며,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특권 직업을 얻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세번째는 사회의 급속한 변화가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필자의 고 3 담임 선생님은 교직을 택하지 하지 않고 그 당시 유행하던 '냉동기 기사'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처럼 한때는 상업 관련 직종이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고, 공대 인기 시대를 지나 이젠 MBA나 의대가 유망한 직종이 되고 있다. 모두 그 당시에 가장 주목받으면서 수익이 많은 직종일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안정세를 구가한 분야가 의료, 법률 분야다. 두 번째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이 분야는 계속해서 안정적인 직업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사회적인 명예나 부를 가진 사람들이 의사나 변호사 사윗감을 찾는 것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직업을 선택함으로써 결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의사나 변호사들도 지금의 공대생처럼 직업에 대한 자괴감에 빠질 날이 생길지 모른다. 예전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기에는 인원이 포화되고 있다고 한다. 사법 연수원 졸업 성적이 취업 후의 수입을 결정하기 때문에 치열하게 시험을 준비하고, 얼마전에는 시험중에 스트레스로 사망하기까지 한 예가 있다. 의사도 더 이상 예전만큼 안정적인 직업이 아니며,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하지만 월급으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높은 교육비와 전세값 때문에 평범한 이공계 출신의 월급쟁이들은 '지구'는 커녕 '가족'조차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자신감 상실에 빠져있다.필자의 친구들중 많은 수가 미국에서 직업을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필자는 이 친구들로부터 왜 아직까지 한국에 남아 있느냐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하지만 필자는 '여기서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미국에서 잘 살 수 있겠느냐'며 되묻곤 한다.솔직히 10년쯤 뒤에 필자가 이 직업에서 어떠한 위치에서 일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필자는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보람과 흥미를 느끼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20년 가까이 프로그래밍을 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아직도 밤늦게 회사나 연구소에 남아 있을 사람들에게 격려를 보내며, 우리가 있기에 '지구'가 있을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싶다. 어쩌면 지금 이런 시련도 '지구'를 정복하려는 '마왕'의 교활한 술책일지 모르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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