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II 컴퓨터는 약 30만대가 판매될 정도로 신생 컴퓨터 산업에서 각광받는 존재였다. 이런 입지에 상당히 고무된 애플은 IBM의 시장 진입을 기꺼이 환영한다는 내용의 전면 광고를 월스트리트 저널에 게재했다.'IBM, 진심으로 환영하오'라는 기사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이 광고는 이듬해 PC 판매량 100만대 달성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애플은 미국 PC 기술을 세계에 전수할 책임감있는 경쟁을 학수고대한다는 문구를 썼다.이러한 환대로 애플은 제무덤을 파 결국 PC하면 IBM으로 통하게 됐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PC 시장의 겨우 5%를 차지하는 수준으로 격하되고 말았다.그 당시 IBM은 애플을 따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IBM PC 개발 책임 이사인 빌 로위는 "IBM은 PC 시장 독주 프로젝트를 수립했고, 애플은 이미 지는 해나 다름없었으므로 이 프로젝트 달성은 무난할 것으로 판단했다"며 "애플은 IBM 개발자들의 많은 관심을 유발하려 했는데 IBM은 자사 개발자들이 IBM PC 개발에 전념하길 바랬다"고 말했다.PC의 대중화로 신망을 얻은 애플 역시 최초의 PC 제조업체는 아니었다. 1970년대에 알테어(Altair)를 판매한 MITS에 그 타이틀을 부여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컴퓨터 산업 선구자인 알랜 케이는 이 영광을 링컨 연구소 산하 링크(the Linc)에 돌린다. 케이에 따르면, 링크는 1960년대에 데스크톱을 주로 의료업체에 판매했다고 한다.제록스로 유명한 팔로알토 연구센터에서 PC 개발에 조력한 후 알테어와 애플에서 PC 개발을 계속했던 케이는, 초기 모델 구매자는 여름기간 동안 링컨의 매사추세츠주 본사를 방문해 그들이 구입한 컴퓨터를 조립해야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처음에는 링크 데스크톱도 단순한 킷일 뿐이었으나 결국 조립과정이 점점 더 자동화됐다고 한다.그러나 정작 IBM에 PC 시장의 가능성을 일깨워준 것은 바로 애플 II였다. 많은 사람들이 최초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라고 부른 비지캘크 스프레드시트를 바로 애플 II를 통해서 컴퓨터 구매자들이 최초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케이는 "IBM PC가 애플 II를 모방하지 않았다면, IBM이 PC 시장에 진입이나 할 수 있었겠냐?"고 반문했다. 그 당시 매킨토시를 개발하고 있던 제프 래스킨에 따르면, 더욱이 애플이 광고를 통해 IBM을 빈정된 것이 실수였다고 한다. 모두가 잘 알듯이 애플의 공동 설립자 스티브 잡스와의 불화로 1982년 2월 애플을 떠났던 래스킨은 "IBM은 단순히 PC 시장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애플 시장을 눌러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애플은 당시 자사의 OS를 라이선스할 지 여부를 놓고 고심했는데, 그것은 애플이 자사 제품이 경쟁사에 노출되는 유통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칩 제조업체인 인텔과 소프트웨어 제조업체인 MS가 PC 분야에서 일관되게 수익성있는 사업을 영위해가고 있었던 점을 볼 때 애플의 이러한 우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반면 IBM과 다른 업체들은 여전히 암울한 PC 사업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비지캘크 공동 개발자인 다니엘 브릭클린은 제품 폐쇄 전략은 시장을 제한하는 역효과도 있지만, 제품의 계속적인 혁신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애플에 득이 될 수도 실이 될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애플이 PC 시장의 대부분을 경쟁사에 내준 건 사실이지만, 여타 동시대의 동종업체보다는 나은 편이다. 그 당시 오스본, 코모도, 탠디, 아타리같은 PC 업체들의 대부분은 컴퓨터 사업의 전망을 어둡게 봐서 PC 개발에서 손을 뗐다. @PC 탄생 20년 회고록「그 현장 속으로」①PC 탄생 20년 회고록「그 현장 속으로」②「PC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