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반짝 스타가 아니라 길게 봐야 돼."
대학생 시절 지도 교수님이 던진 이 한마디는 당시 스물한 살이던 배우 권소희에게는 이정표가 됐다. 대형 기획사에 들어가고 주연 자리를 꿰차는 동기를 바라보며 그는 '오래 걸릴 것'이라는 예언 같은 응원을 품고 묵묵히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쌓고 있다.
1999년생, 이제 막 스물여덟살 문턱에 들어선 그는 무대를 원한다. 유명 배우는 아니지만 그는 관객의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기구한 삶’을 성숙하게 그려내겠다며 자신만의 속도로 걷고 있다.
권소희는 주로 연극 무대에서 경험을 쌓아 왔다. 부모를 잃었거나, 아이를 잃었거나, 삶의 수모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소위 ‘기구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그의 단골 배역이었다.
그는 "학교 다닐 때부터 유독 그런 역할이 많이 들어왔어요. 나이에 비해 성숙한 분위기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사실 저는 평소에 감정을 안으로 꾹꾹 눌러 담는 스타일인데, 연기할 때만큼은 그걸 다 쏟아낼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연기를 통해 제 안에 숨겨진 자아를 발견하고, 비로소 저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권소희가 처음부터 연극만을 바라봤던 것은 아니다. 시작은 막연히 스크린 속 주인공을 꿈꾸는 영화배우 지망생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어두운 극장에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에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이라 여기던 시절이다. 하지만 대학 시절 우연히 선 연극 무대 위에서 또 다른 경로를 찾게 됐다.
"학교에서 연극을 하며 '커튼콜'을 경험한 순간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관객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그분들의 에너지를 실시간으로 마주하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죠. 무대와 객석 사이의 막이 사라진 것 같은 그 호흡이 저를 연극의 매력에 빠뜨렸어요."
그는 이제 자신의 연기가 단순히 '척'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직접 전달되는 진심이길 바란다. 사람들이 귀한 시간과 돈을 들여 극장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즐거움뿐 아니라 위로 받기 위해서라는 것을 무대 위에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면서 눈물 흘리고 삶의 의지를 부여잡고 싶은 순간들이 있잖아요. 제 연기를 보며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고 동화되는 순간이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관객에게 그만한 가치를 돌려주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유튜브의 등장과 OTT 플랫폼 확대로 콘텐츠 시장이 커졌다지만 신인 배우들에게 돌아가는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제작사들은 검증된 배우만 반복해서 기용하고, AI 기술이 각본과 연출은 물론 배우의 영역까지 위협하는 시대다. 권소희는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양가감정'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우리가 설 자리가 많아졌다고들 하지만 실상은 더 힘들어졌어요. 인지도가 있는 분들만 계속 기용되다 보니 시작조차 못 하는 배우들이 태반이죠. 심지어 이제는 무대에 배우 대신 AI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더라고요. '더 많은 작품이 나오겠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내 자리가 없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무서움이 공존해요."
이런 불안감은 세월이 등을 떠밀고 있는 부모님의 걱정과 맞물려 꿈을 지닌 이를 잠에서 깨어나라는 듯이 흔든다. 평생 연기하고 싶다는 권소희 역시 이런 순간마다 흔들린다고 털어놨다. 자신의 꿈을 언제까지 쫓아야 하는지 기약 없는 노력을 이어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통이다.
"매 순간, 1분 1초마다 생각이 바뀌어요. 이게 정말 내 길이 맞는지 모르겠고 빨리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할까 하는 고민이 깊어지면서 한동안은 영화나 연극을 아예 못 봤어요. 보면 너무 하고 싶고, 내가 저 자리에 있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거든요."
그런 불안함 속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기 실기를 전공하며 내실을 다지는 한편, 직접 희곡을 쓰고 기획과 마케팅 공부까지 병행하고 있다. 배우를 포기한 게 아니다. 내실을 다져 배우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창작 영역'으로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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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소희의 롤모델은 배우 염혜란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보다 작품 속에서 단단하게 뿌리 내린 발자취를 닮고 싶어 한다.
"요즘은 꿈이 없는 친구들도 많다고 해요. 그런 시대에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료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 포기하지 말자고. 저도 나중에 꼭 성공해서 '그때 이런 인터뷰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