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AI 반도체 스타트업 대표주자인 사피온과 리벨리온이 지난 12일 합병을 발표했다. 두 회사의 결합은 급변하는 글로벌 AI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을 모아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결정이다.
양사는 합병 이후 소프트웨어 기술 개발에서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 반도체 설계 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으나, 소프트웨어 기술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의 AI 개발용 소프트웨어 '쿠다(CUDA)'와 맞설 수 있는 소프트웨어 기술을 개발해야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 엔비디아 '쿠다'에 맞서려면...소프트웨어 개발에 총력 기울여야
현재 AI 반도체(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는 90%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엔비디아 칩은 전력이 많이 필요하고 가격이 비싸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주문이 밀려 있는 상태다.
엔비디아가 올해 하반기 출시하는 블랙웰 B100은 3만~4만 달러(약 4100만~5500만원)의 고가에도 불구하고 데이터센터 업체들이 치열하게 구매 경쟁을 벌일 정도다.
후발주자인 국내 AI 반도체 업체인 리벨리온, 사피온, 퓨리오사AI 등은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와 차별화된 NPU(신경망처리장치) 방식을 채택해 개발 중이다. 이들 업체는 글로벌 AI 반도체 성능 경연 대회에서 엔비디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능 테스트 결과를 보이며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례로 리벨리온의 AI 반도체 '아톰(5나노 공정)'은 지난해 4월 인공지능(AI) 반도체 벤치마크 테스트 엠엘퍼프(MLPerf) 언어모델(BERT) 테스트에서 엔비디아의 동급 제품(엔터프라이즈 서버용 GPU T4)보다 1.5~2배 빠른 처리속도를 기록했으며, 비전모델 테스트에서도 3배 이상 빠른 속도를 보이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같은 대회에서 사피온과 퓨리오사AI도 엔비디아 반도체의 특정 성능(이미지 처리·전력 효율) 부문에서 뛰어넘는 결과를 냈다.
그러나 국내 AI 반도체 기업들은 소프트웨어 부분에서는 엔비디아와 경쟁하기에 크게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엔비디아 칩이 각광받는 이유는 칩 성능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쿠다'도 큰 역할을 한다. 많은 개발자들이 오랜 기간 쿠다로 프로그래밍을 하고, 코드가 축적되면서 '강력한 쿠다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개발자가 편의를 위해 엔비디아 AI 반도체를 쓸 수밖에 없는 이른바 '락인(Lock-in)' 효과가 생긴 것이다.
김용석 성균관대학교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반도체공학회 부회장)는 "국내 AI 반도체 기업이 기술력을 바탕으로 성능 좋은 AI 반도체를 내놓으면 충분히 세계 시장을 장악할 수 있으나 소프트웨어 수준은 엔비디아의 쿠다(CUDA)에 훨씬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시스템반도체 25년 경력의 전문가는 "쿠다 에코시스템에 익숙해진 개발자들은 단순히 하드웨어 성능이 좋고, 가격이 저렴하다고 칩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며 "AI 반도체는 단순히 NPU만 잘 만들어서 될 일이 아니라, 하드웨어를 지원해주는 소프트웨어 환경을 구축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특히 소프트웨어는 컴파일러가 매우 중요하다. AI 반도체는 하드웨어뿐 아니라 컴파일러와 라이브러리의 성능이 전체 성능을 결정한다"며 "모델의 변환 과정에서 컴파일러는 사용자의 모델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대규모 연산과 메모리를 NPU의 모든 자원들을 잘 활용하도록 최적화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엔비디아는 이를 잘 구축해 놓았다. 반면, 다른 회사의 칩들은 모델들이 실행되지 않거나 실행되더라도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해서 성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 "리벨리온과 사피온이 합병 이후 칩 상용화에 성공하려면 소프트웨어 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분산된 양사의 인력이 합쳐지면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높이고 글로벌 시장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며 "이번 합병은 국내 AI 반도체 산업의 발전과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 사피온-리벨리온 합병, 3분기 통합법인 출범...SKT-KT 적극 지원
사피온과 리벨리온은 실사와 주주동의 등 필요한 절차를 거쳐 3분기 중으로 합병을 위한 계약 체결을 마무리하고 연내 통합법인을 출범시킬 계획이다. 통합법인명은 아직 미정이며, 법인 출범 시기에 맞춰 결정할 예정이다. 합병 이후 경영은 리벨리온에서 담당하며, 현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가 합병법인을 이끈다.
사피온은 2016년 SK텔레콤 내부 연구개발 조직으로 출발해 2022년 분사한 AI 반도체 팹리스 기업이다. 당시 SK ICT 연합 3사(SK텔레콤, SK하이닉스, SK스퀘어)가 공동 투자해 출범했다. 사피온은 지난해 11월에는 추론용 NPU 시장을 겨냥한 차세대 칩 X300(7나노, TSMC 생산)을 출시해 올해 양산을 앞두고 있다.
관련기사
- 美서 반도체·AI 챙긴 이재용 회장의 각오…"열심히 해야죠"2024.06.13
- 사피온-리벨리온 합병…업계 "국내 AI 반도체 경쟁력 위해 긍정적"2024.06.12
- 美, 中에 'GAA·HBM' 등 AI반도체 기술 수출 규제 논의2024.06.12
- SKT 계열사 사피온, KT 투자한 리벨리온 합병 추진2024.06.12
리벨리온은 2020년 박성현 대표와 오진욱 CTO 등이 공동 창업한 AI반도체 팹리스 스타트업이다. 창립 이후 3년간 ‘아톰(5나노, 삼성전자 파운드리)’ 등 2개 제품을 출시했고, 현재 차세대 AI반도체 ‘리벨(REBEL)(4나노, 삼성전자 파운드리)’을 올해 4분기 양산할 예정이다.
사피온의 전략적 투자자인 SK텔레콤은 합병 이후에도 전략적 투자를 이어가고, 사피온의 주주사인 SK스퀘어와 SK하이닉스도 대한민국 AI반도체 발전을 위해 합병법인 지원할 예정이다. 또 리벨리온 투자자인 KT도 세계적 수준의 AI반도체 기업 탄생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고 뜻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