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지옥을 경험한다.” 실존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한 말이다. 각종 매체와 언론은 지난달 17일 발생한 행정전산시스템 장애 사태의 전말과 원인에 대한 진단을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사고 원인과 진단은 다양하더라도 대중을 상대로 한 매체들의 관통하는 시각과 논조는 이러하다. ‘이번 사태 원인은 중소기업이며, 해결책은 대기업’이라는 것이다.
■ 본질 외면하고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 근거없는 보도로 혼란 부추겨
사고의 원인을 진단하는데 난데없이 ‘중소기업’이 왜 나올까. 게다가 ‘대기업이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투의 논조들은 황당하다. 기자들은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즉흥적 견해를 인용하면서 보도의 논조를 정당화하려 했다. ‘수억 줄에 달하는 프로그램 코드를 분석해봐야 고장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라거나 ‘여러 소프트웨어(SW) 간 충돌’ 혹은 ‘낙후된 데이터 관리가 원인’이라는 등 마치 장님이 코끼리 더듬는 식의 근거 없는 보도로 상황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이런 추상적 추론과 왜곡된 시선은 관련 당사자들을 더욱 잔혹한 지옥으로 몰아간다.
이번 행정망 중단 논란의 단초가 된 지방행정시스템 ‘새올’과 대국민 서비스시스템 ‘정부24’는 십수 년 간 수천만 국민이 문제 없이 이용해온 국가 대표시스템이다. 필자는 이들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관리해온 중소기업 대표다. 저가입찰, 수많은 계약 변경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나름의 긍지와 사명으로 전문성과 기술로 승부하며 우리나라 전자정부의 25년 역사와 함께했다. 우리나라 전자정부는 UN 등 국제기구에서 인정하듯 세계 선도적 지위에 있고, 이는 누가 뭐라 해도 그간 공무원들의 헌신과 참여 기업의 전문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정부 사업 전체를 매도하면서, 이번 사태의 원인을 중소기업에서 찾고 해결을 대기업에서 구하는 식의 보도는 정말 잘못된 일이다.
전자정부 사업에 대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이분법적 시각은 2013년부터 시행된 대기업의 공공소프트웨어사업 참여 제한 조치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조치 시행 당시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는 건가? 단언컨대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둘 다 지극히 대증적이며 단선적인 사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 중국 전역에 광풍처럼 일었던 ‘참새박멸’ 운동의 논리가 무엇이었나. 인구 폭증으로 식량 부족이 심각해지자 곡식을 먹어 치우는 참새를 박멸하면 해결될 것이란 발상 아니었나. 우리는 이를 두고 어처구니없다며 비웃는다. 필자는 소수 대기업이 공공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을 독식하면서 관련 산업 생태계를 망가뜨린다는 이유로 진입장벽을 쳤던 것과 '참새박멸'이 비슷하다고 본다. 그런데 이제와서 대기업 진입장벽을 철폐해야 한다는 논리는 또 무언가.
그간 장애를 일으킨 시스템 중 그 시스템을 개발하거나 유지보수를 맡은 업체가 모두 중소기업이며, 이는 대기업 진입을 막아 빚어진 결과라고 하는데, 이를 뒤집어 대기업이 만들었던 차세대 공공시스템 중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를 일으킨 사례를 열거한다면 뭐라 답하겠는가. 또 대기업이 어려움을 겪을 때 중소업체가 들어가 수습한 사례를 제시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하다. 이미 관련 자료는 인터넷에 있으므로 사례들을 새삼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19년 일정 규모 이상 사업에 대기업 참여가 재개된 차세대 전자정부 사업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오랜 세월 대기업이 독과점했음에도 국민 앞에 내놓을 만한 전자정부 솔루션이 몇 건이나 있는지 살펴보면 모든 게 드러날 것이다.
■ 문제 해결은 기업 규모 아냐...사업자 외형이 아니라 실력있는 곳이 사업을 맡아야
문제의 해결은 대기업 진입을 열거나 막는 데 있지 않다. 사업자 선정 과정의 투명한 공정 경쟁체계 마련이 해결의 핵심이다. 공정경쟁 기준은 사업자 외형이 아니라 실력이어야 한다. 지난해까지 3년간 수행된 차세대 건축행정시스템(‘세움터’) 사업의 경우 제날짜에 운영을 개시한 이래 거의 완벽한 작동을 구현한 장본인이 중소기업이란 사실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국토교통부가 이전에도 그랬듯 당연하기에 보도자료를 내지 않아 안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 사례는 대형시스템일지라도 개발주체를 업체의 외형으로 구분해 따진다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언론은 이번 장애의 원인을 개발업체의 규모 탓으로 돌리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의문에서 그 원인을 찾았어야 했다. ‘오랜 기간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시스템이 왜 갑자기 멈췄을까’하는 질문이다. 이번 먹통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시스템들은 작동 중 멈췄던 게 아니라 접속 이전 인증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후 주민등록, 전자조달, 모바일 신분증 발급관리 등 여러 건의 크고 작은 오류가 잇달았다.
결국 이번 사건은 ‘소프트웨어 문제가 아니라 장비 노후로 인한 것’이었다는 해당 부처의 공식 발표로 소프트웨어가 주범이 아니라는 오명을 벗긴 했지만, 어떤 언론사도 정정보도나 사과는 없었다. 오히려 중소기업이 실력이 없어서라고, 대기업 참여 제한 조치를 풀어야 한다는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행여 정부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기업 진입을 다시 허용하면서 실력으로 승부하는 ‘공정경쟁’을 외칠까 우려스럽다.
사람은 주변의 사랑과 인정을 먹으며 성장한다. 사회적 인정 욕구가 좌절되면 무기력이 학습된다. 무기력이 만연한 세상에 희망은 없다. 서울과 지방,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대한 편견이 사회 전체의 집단사고로 상존하는 한 대기업에 속하지 않은 국민 다수는 좌절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
■ SW산업 특성 이해해야...지금 같아선 작지만 강한 기술기업이 발전하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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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부가 소프트웨어산업 육성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사회 전체에 만연한 잘못된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작지만, 강한 기술기업이 승리하는 세상’은 먼 나라 얘기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소수의 황새가 지배하는 중후장대산업과 달리 소프트웨어산업은 한 마리 뱁새가 수천, 수만 명을 먹여 살리는 특성이 있다. 이것이 소프트웨어산업의 성장경로다.
좌절한 뱁새들과 관료화된 소수의 황새로는 소프트웨어산업을 성장시키기 어렵다. 창의와 도전으로 무장된 다수의 뱁새가 겁 없이 달려드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이러한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미국의 소프트웨어산업, 스타트업 벤처가 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려면 대중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지옥을 경험하지만, 희망을 읽기도 한다. 부디 이번 사태에 대한 왜곡된 보도를 바로잡고 정론으로 거듭날 것을 정중히 요청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까.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