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초 마무리 투수 고우석이 KT 조용호를 삼진으로 돌려세우자 LG 덕아웃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외국인 선수 오스틴이 옆 선수에게 ‘하나 남았다’고 하는 장면도 잡혔다. KT의 마지막 타자 배정대 선수가 친 공이 2루수 신민재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중계 카메라는 본부석에서 환호하는 구광모 구단주를 클로즈업했다.
유광 점퍼를 입은 구광모 회장이 두 손을 번쩍 드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어 옆자리에 있던 LG 스포츠 김인석 대표이사와 포옹하면서 기쁨을 나눴다. 튀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것은 아낌없이 지원하는 구단주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LG 트윈스가 29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LG가’의 남다른 야구 사랑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많은 언론들은 롤렉스 명품시계와 아오모리 소주를 소환했다. 롤렉스 명품 시계는 고 구본무 회장이 2018년 해외 출장지에서 사 온 '선물'이다. 고 구본무 회장이 한국시리즈 MVP에게 줄 선물로 마련했다는 명품 시계다.
‘아오모리 소주’에도 LG가의 V3 열망이 짙게 배어 있다. 이 소주는 1994년 우승 축하 회식 때 함께 마셨던 술이다. 역시 고 구본무 회장이 1995년 시즌 초 “우승하면 함께 마시자”며 준비했던 술이다. ‘베일에 가려졌던 두 소품’이 29년 만에 제 역할을 하게 됐다.
■ 구단주의 야구 사랑? 절제된 사랑이 더 중요
LG 트윈스가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리기까지 ‘오너 일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와 달리 한국에선 LG 일가처럼 대를 이어가며 야구 사랑을 실천하는 구단주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LG 구단의 우승이 더 감동적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LG가의 지원을 설명하기엔 ‘야구 사랑’이란 말 만으론 부족하다. 초창기와 달리, 요즘은 웬만한 구단주들은 '남다른 야구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LG가의 야구 사랑이 돋보이는 건 ‘절제된 사랑’이란 점 때문이다. 필요한 부분은 전폭적으로 지원하지만, 현장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 때는 과감하게 뒤로 물러나 준다. '지원을 하되, 간섭은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가능하면 현장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조용하게 지원해 왔다. LG 초대 구단주였던 고 구본무 선대회장부터 지금까지 그 부분을 잘 실천해왔다.
얼마 전 인기리 방영됐던 드라마 ‘스토브리그’에는 “날이 따뜻해진 것을 보니 단장의 시간은 끝난 것 같습니다”란 대사가 나온다. 시즌이 시작되면, 선수들이 주인공이라는 의미였다.
이 말은 야구 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에선 상식이나 다름 없는 얘기다. 결국 경기를 하는 건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야구계에선 의외로 이 상식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만큼이나 지배하려는 욕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론 감독 선임이나, 구단 운영에까지 직접 간섭하기도 한다.
LG 구단주들의 절제된 행보가 돋보이는 건 이 대목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야구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다른 구단주들이 쉽게 갖기 힘든 ‘절제미’를 잘 보여줬다. ‘전폭적으로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이런 문화 덕분에 LG 야구의 상징인 ‘신바람 야구’가 마음껏 꽃 피울 수 있었다.
■ 야구단에 큰 힘 되어준 젊은 리더십
13일 한국시리즈 우승 시상식에서 보여준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구광모 구단주는 "변함없이 LG 트윈스를 사랑해주시고 응원해주신 팬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며 관중들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리곤 "매 순간 최고의 감동을 선사해준 우리 자랑스러운 선수단과 스태프에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는 “2023년 챔피언은 LG 트윈스입니다. 무적 LG 파이팅"이라는 말로 우승 소감을 맺었다. LG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으며 기쁨을 함께한 구광모 회장은 시상식 공식 행사가 끝나자 조용히 경기장을 떠났다. 진짜 주인공인 선수들에게 자리를 내준 것이다.
언뜻 보기엔 별 것 아닌 것 같다. 하지만 LG 구단주들의 이런 ‘절제된 모습’은 선수단에겐 큰 힘이 됐다. 선수들이 주목받아야 할 때는 조용히 물러날 줄 아는 '젊은 리더십'을 누구보다 잘 실천해줬다.
물론 LG 야구단이 우승을 차지한 것이 구단주 만의 공은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현장에서 뛴 선수단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MVP를 차지한 오지환을 비롯해 박동원, 박해민 등 주요 선수들이 적재적소에서 자기 역할을 해줬다. '염갈량'으로 불린 염경엽 감독의 적절한 용병술도 승부의 추를 LG 쪽으로 돌려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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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원은 극대화하면서도 간섭을 최소화하는' 구광모 회장의 '젊은 리더십'도 우승의 밑거름이 됐다. 덕분에 야구단이 마음껏 뛰면서,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29년 우승 가뭄'을 해소한 LG 구단의 성과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건 이런 점 때문이다.
고 구본무 회장이 1990년 MBC청룡을 인수해 LG 구단을 창단할 당시 나이가 45세였다. 그 해 LG는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다. 공교롭게도 올해 구광모 회장 나이도 45세다. 세대를 뛰어넘은 그들의 '젊은 리더십'이 야구판에도 잔잔한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