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차분했다. 자신을 중앙지검 검사라고 밝힌 '그놈'은 "계좌가 범죄 조직 자금 세탁에 사용됐다"고 말했다. 검찰청·금감원·은행 등 어디에 전화해도 같은 답이 돌아왔다. 겁을 먹은 의사 A씨는 대출까지 받아 보이스피싱 조직에 41억원을 송금했다. 단일 건수로는 역대 가장 큰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이었다.
이제 전화기 너머 투박한 연변 사투리나 '김미영 팀장'은 없다. 우리나라 경제·사회 상황에 맞춘 정교한 시나리오와 악성 애플리케이션(앱), 가상자산과 같은 최첨단 통신금융기술로 무장한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이 서민의 통장을 노리고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피해자를 속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범죄 수법과 수단은 자고 일어나면 진화하는데 우리 사회의 인식은 15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최일선에서 보이스피싱 범죄에 맞서고 있는 유지훈 경찰청 금융범죄수사계장(46·경정)의 말이다. 경찰대학교를 졸업하고 2001년 입직한 유 경정은 20년 넘게 수사부서에서 일하며 노하우를 쌓은 보이스피싱 수사 기획의 베테랑이다. 지난 13일 경찰청에서 <뉴스1>과 만난 유 경정은 보이스피싱 범죄의 심각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 '맞춤형 시나리오' '악성앱' '변작기' 등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범행 수법
유 경정은 "보이스피싱 조직에는 통신·금융·수사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최근 보이스피싱 수법은 17년 전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어설프지 않다. 범죄 조직은 △공문서 조작 △악성 앱 강제설치를 통한 강수강발(강제수신·강제발신) △범죄에 가상자산을 활용하는 등 전문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미리 확보한 개인 정보를 활용해 피해자들의 심리적 허점을 노린다. 속을 수밖에 없는 '맞춤형 시나리오'를 제작하는 셈이다.
유 경정은 "경기 침체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정부지원금으로 저금리 대환 대출'을 해 주겠다거나 소상공인에게 '코로나19 정부지원금 지급 안내'를 미끼로 접근하는 것이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금융기관이나 검찰을 사칭해 보안프로그램, 수사기관 사이트, 대출신청서 등 링크를 통해 악성 앱을 다운받게 만드는 강수강발 수법까지 더해진다. 악성 앱이 설치되는 순간 휴대전화의 모든 개인정보가 넘어가는 것은 물론, 전화까지도 가로채진다.
유 경정은 "(피해자는) 받고 거는 모든 전화가 통제되며 심지어 카메라와 녹음 기능, 위치까지 제어돼 조직원들이 바로 경찰, 검찰, 금감원, 은행직원이 된다"며 "강수강발은 가장 피해자들을 강력하게 꾀어내는 믿게 만들 수밖에 없는 수법이라 경찰들은 (악성 앱이 설치하는 것을) '날 받았다'라고 표현할 정도"라고 강조했다.
해외 인터넷 전화번호인 '070'을 '010'으로 바꿔주는 번호 변작 중계기(변작기)도 진화했다. 이들은 과거 모텔에 숨겼던 변작기를 단속을 피하고자 논·밭, 개집, 건설 현장, 소화전 등 온갖 곳에 숨겨둔다. 차량 또는 가방에 넣어 지하철이나 KTX를 타고 이동하는 인간 중계기 방식도 나타났다.
유 경정은 "변작기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쓰는 핵심 장비인 만큼 전국을 돌며 모두 적발하고 있다"며 "고생은 많이 하지만 뜯어내는 만큼 보이스피싱 피해 건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고 힘줘 말했다.
◇ 경찰, 지난해에만 2만5000명 검거…피해액과 발생 건수 30% 줄이는 성과도
경찰은 진화하는 보이스피싱에 예방·검거·협업 등 3차원으로 중점 대응하고 있다. 피해 회복이 어려운 만큼 단순 검거에서 벗어나 보이스피싱을 근절하기 위해 세운 대책이다.
유 경정은 "국내엔 수거책 등 말단만 알바로 충원하고 있어 총책을 잡아내는 것이 핵심"이라며 "중국, 필리핀 등 인터폴이나 현지 이민청과 협업을 해서 검거해 송환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경찰은 총 2만5000여명을 검거했다. 특히 중국 거점 8개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 등 95명을 검거(40명 구속)하고 필리핀 거점 최대규모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 등 39명(10명 구속)을 검거하는 성과도 올렸다.
이외에도 대포통장‧유심 유통 범죄조직, 지급정지 제도를 악용한 '통장협박' 조직, 변작기 중계소 운영책, 불법환전소 등을 단속해 총책과 관리책 등 수백명을 붙잡기도 했다.
또 범행 자체를 차단하기 위한 예방적 수사에도 집중하고 있다. 유 경정은 "미끼 문자 발송업체를 찾아내고, 중계기를 뜯어내 범행에 사용된 전화번호, 카카오톡 ID를 이용중지 시키고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잡아내고 있다"며 "악성 앱도 최대한 차단해 범행이 이어지지 못하게 중간에서 끊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찰은 지난해에만 보이스피싱 범죄 이용 수단인 전화번호 16만8047개, 악성앱 5982개, 카카오 계정 6946개, 변작기 1만4910개를 차단했다.
경찰의 이러한 노력은 성과로 이어졌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1년 3만982건이던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지난해 2만1832건으로 29.5% 감소했다. 같은 기간 피해액도 7744억원에서 5438억원으로 29.8% 감소했다. 첫 피해가 신고된 2006년 이후 16년 만에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이다.
유 경정은 "해외총책 등 상선을 검거하고 금융위 과기부 및 금융기관 통신사 등과 함께 피싱 예방 정책을 추진하고 수단을 차단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범행이 차단되며 이같은 결과가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변화하는 수법에 한계점도…"보이스피싱 시험공부하듯 공부해야 안 당해"
이처럼 수사기관과 당국의 노력으로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에서도 성과가 나타나고 있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는 범죄인 탓에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빈틈을 노리기 때문이다.
유 경정은 "아무리 수사기관에서 예방 활동이나 계도하더라도 범죄 조직들은 계속 회피 수단을 마련하고 있다"며 "지금 최선을 다해 잘 막고 있는 부분도 언젠가는 한계점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대포통장을 강력히 단속하고 계좌이체를 어렵게 만들자 범죄 조직들은 대면편취와 상품권, 가상자산, 환치기 등으로 갈아탔다. 자금 세탁 방식도 금이나 명품백, 화장품까지 이용되는 등 다양한 수단이 활용되는 추세다.
또 "최근에는 전화는 처음 연락에만 사용하고 카카오톡 등 메신저 앱을 통해 악성 앱을 설치하도록 하는 등 보이스피싱 범죄에 메신저 앱 활용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며 "기업에서도 수사기관의 요청이 왔을 때 단순 이용정지뿐만 아니라 인력을 늘려 영장 회신을 요청했을 때 더 빠르게 대응한다든지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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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유 경정은 "정말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보이스피싱에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고 공부해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라며 "보이스피싱 피해는 자금이 세탁돼 해외로 빠져나가 회수가 어려운 만큼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수법에 맞춰 시험공부하듯 공부를 해야 당하지 않는다"고 당부했다.
제공=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