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기반 결제 서비스 '페이코인'이 결국 은행 실명계좌를 얻지 못해 사업을 접어야 할 운명에 처했다. 가상자산 업계는 2년 전 중소 거래소들이 같은 이유로 사실상 '개점 휴업'에 들어간 상황이 재연된 것으로 보고 있다.
2021년 3월 개정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이 시행되면서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그 해 9월까지 실명계좌를 확보해야 원화 거래를 지원할 수 있게 됐다. 이를 위해 사업자들이 은행과 실명계좌를 공급받기 위한 계약을 추진해왔지만, 성공한 사업자는 5곳에 불과하다. .
당국이 은행 실명계좌를 원화 거래 사업 요건으로 도입한 이유는 자금세탁 방지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업계는 당국이 수행해야 할 사업자 관리 감독을 은행에 떠맡기는 상황을 초래했고, 산업 성장을 저해하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현재 업계 전반에 자금세탁 방지를 위한 인프라가 구축됐다는 점에서 규제 완화에 따른 위험성도 해소됐다고 주장한다.
■ 중소 거래소 다음엔 '페이코인'…시총 3400억 증발
페이코인 운영사 페이프로토콜은 지난 6일 금융정보분석원(FIU)으로부터 가상자산사업자 신고 불수리 결정을 통보받았다. 회사는 지난해 사업자 신고 과정에서 가상자산 매매와 결제, 현금 정산 등 페이코인 서비스 과정을 계열사 관여 없이 전담하는 방식으로 사업 구조를 바꿨다. FIU는 페이프로토콜에 연내 은행 실명계좌 확보를 사업자 신고 수리 요건으로 제시했는데, 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이다.
페이프로토콜은 은행과의 논의 과정이 길어지면서 실명계좌 확보가 지연되자 FIU에 기한 연장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FIU는 다음달 5일까지 페이코인 서비스 종료에 필요한 조치를 수행하라고 요청한 상태다.
서비스에 사용되는 페이코인(PCI)의 용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페이코인 시세는 급락했다.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지난 6일 300원을 웃돌던 페이코인은 현재 200원 밑으로 떨어졌다. 페이코인 총 발행량이 34억3천75만개인 점을 고려하면 약 3천400억원이 사라진 셈이다.
코인이 원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원화마켓 거래소들을 회원사로 둔 디지털자산거래소공동협의체(DAXA)도 페이코인을 서비스 종료 예정일 다음날인 2월6일까지 투자 유의 종목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유의 종목 지정 사유가 해소되지 않을 경우 거래 지원을 종료할 계획이다.
은행 실명계좌가 사업의 명운을 좌우했다는 점에서 중소 가상자산 거래소 대부분이 핵심 사업 모델인 원화 거래 서비스를 중단, 폐업 기로에 놓이게 된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페이코인 측은 그 동안 자금세탁 방지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해왔음에도 최종적으로 FIU가 사업자 신고 불수리 결정을 내린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페이프로토콜 관계자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 가이드라인 등 글로벌 규제 동향을 보면 가상자산 기반 결제 서비스는 가상자산 거래 서비스보다도 자금세탁 위험이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며 "결제 서비스는 자금의 출처와 용처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는 PG사에 대해 일정 금액 이하 결제 건에 대해선 자금세탁 방지 의무를 부과하지도 않는다"고 설명했다.
페이코인의 경우 결제 한도를 건당 50만원, 월 1천만원으로 제한하는 등 자금세탁 우려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도 도입했다고 덧붙였다.
■ '자금세탁 방지' 임시 방편으로 도입됐지만..."유효 기한 다했다"
은행 실명계좌가 가상자산사업자 신고 수리 요건으로 도입된 것에 당위가 없진 않다. 개정 특금법이 논의될 당시엔 자금 이동 상황을 추적하는 '트래블룰' 실시를 위한 솔루션도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금세탁이 의심될 경우 이를 추적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은행 실명계좌 기반의 서비스가 필요했다.
개정 특금법이 통과된 지 2년이 돼 가는 현 시점에선 은행 실명계좌를 동반하지 않더라도 자금세탁 가능성을 차단한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을 만큼 업계 인프라가 향상됐다는 의견이 나왔다.
자금세탁방지전문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던 정지열 프로비트 이사는 "글로벌 차원에선 실명계좌는 명의만 인증돼 있을 뿐, 오히려 자금세탁을 위한 도관으로 쓰일 위험이 높아 규제 수단으로 쓰지 않는 추세"라며 "계좌 사용자가 본인임을 증명하는 고객확인(KYC) 제도와 트래블룰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대응 가능한데, 개정 특금법 논의 당시 이런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실명계좌를 보완책으로서 썼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지열 이사는 "현재는 가상자산 업계 자금세탁방지 법규가 정비가 됐고, 사업자들이 트래블룰 솔루션도 사용하고 있어 실명계좌가 자금세탁 방지 차원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현재는 본연의 목적이 아닌 행정규제의 수단으로 실명계좌가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사적 계약"이라지만…은행이 선심 써야 협력 관계 유지
실명계좌의 자금세탁 방지 효과가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현 제도가 은행이 '갑'으로 군림하는 형국만 초래하고 있다는 의견이다.
가상자산 사업자가 사업을 영위하려면 실명계좌가 필수이지만, 은행들은 투자 비용 대비 매출 성과가 떨어지는 가상자산을 굳이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사업자들은 은행에 사실상 읍소를 해야 하는 처지다.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A 은행의 경우, 실명계좌를 열어주는 조건으로 마케팅 효과와 구체적인 이익 예상 규모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용자와 거래량이 상위 사업자 몇 곳에 쏠려 있는 가상자산 시장 특성상, 현재 은행의 이런 요구에 매력적인 답변을 할 수 있는 사업자는 흔치 않다는 것이다.
은행들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을 순 없다'는 입장이다. 은행업계 한 관계자는 "증권, 펀드 등 제도권 투자처보다 불확실성이 훨씬 큰 가상자산에 대한 인기가 유동성이 늘어났던 시기와 비교해 급격히 줄었다"며 "은행 입장에서도 가상자산 연동을 위해 인프라 설치와 같은 초기 투자 비용이 필요한데 웬만한 사업자와 협력해선 이익이 남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상자산 업계는 이런 상황에서 실용성 있는 가상자산 기반 서비스는 등장할 수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럼에도 금융 당국은 가상자산 사업자의 자금세탁 예방을 위해 은행과의 협업이 필수라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은행의 실명계좌 발급에 대한 판단은 사적 계약의 영역"이라면서도 "단순히 사업성 위주의 판단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해당 제도를 도입 규정한 특금법 상 자금세탁 방지 목적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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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한 관계자는 "가상자산사업자와 은행권 모두 같은 배를 타는 걸 부담스러워 하지만 당국이 이를 고집하는 건, 암호화폐 관련 자금과 세금 흐름을 추적할 때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금융제도는 미국에서 먼저 가이드라인이 나오면 이를 기준으로 국내 실정에 맞게 살짝 변경하는 경우가 많다"며 "미국에서 관련 제도에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러한 기조는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