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꼭 닮았지만 아무리 회전해도 서로 겹쳐지지는 않는 키랄성 분자들을 국내 연구진이 분리해내 주목된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 노도영)은 김기문 복잡계 자기조립 연구단장 연구팀이 소리만을 이용해 한 용액 안에서 서로 다른 키랄성을 가지는 분자들을 공간적으로 분리하는데 성공했다고 16일 밝혔다.
이 연구는 화학 분야 학술지 '켐(Chem)'에 실렸다.
서로 거울에 비친 모습과 같은 구조를 가지는 분자의 성질을 거울상 이성질성 또는 키랄성이라고 한다. 생체분자들은 특정 키랄성을 가지는 분자만 사용한다. 반대의 키랄성을 가진 분자는 사용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해로운 작용을 하기도 한다.
1950년대 유럽에서 판매된 약물 ‘탈리도마이드’는 의약품 개발에 있어 키랄성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탈리도마이드의 한쪽 거울상 이성질체는 입덧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었지만, 반대쪽 이성질체는 혈관의 생성을 억제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로 인해 약 1만 명 이상의 기형아가 태어났다.
하지만 키랄성 분자들은 입체 구조적 관점에서만 서로 다를 뿐, 물리‧화학적 성질이 유사하기 때문에 용액 안에서 두 물질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연구진은 소리를 이용했다. 스피커 위에 페트리 접시를 올려둔 뒤 주파수 100㎐ 이하의 소리를 재생하면, 미세한 상하 진동으로 인해 접시 안에 동심원 모양의 물결이 생긴다. 물결에는 움직이지 않는 마디 부분과 주기적으로 상하운동을 하는 마루와 골이 있다. 마디가 일종의 가림 막 역할을 해, 마디를 경계로 용액이 섞이지 않고 구획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연구진은 마디를 경계삼아 산화-환원에 따라 서로 다른 키랄성을 보이는 분자를 이용해 실험을 진행했다. 페릴린 다이이미드(PDI) 분자는 L-페닐알라닌 유도체(LPF) 분자와 결합하면 왼쪽 방향으로 꼬인 고분자를 형성한다. 반면 PDI 분자가 환원되면, 오른쪽 방향으로 꼬인 고분자를 이룬다. 키랄성이 다른 두 분자는 각각 붉은색과 푸른색을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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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진은 환원된 PDI/LPF 용액이 담긴 접시에 소리를 재생했다. 공기와 접촉이 활발한 마루 부분에서는 산화 반응이 일어나며 용액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이에 따라, 페트리 접시에는 산화된 붉은색과 기존의 푸른색이 번갈아 나타나는 동심원 모양의 색깔 패턴이 나타났다. 서로 다른 키랄성을 가지는 물질이 한 용액 안에서 각각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김기문 단장은 "소리는 에너지가 작아 화학반응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여겨졌지만, 우리 연구진은 지금까지 소리로 산화-환원 반응, 효소 반응 등을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라며 "특히 이번 연구의 결과가 의약품 제조 등 키랄성 물질의 분리‧조절이 필요한 여러 화학 반응에서 획기적 도구로 사용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