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유럽 등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신약 개발에 나서는 국내 제약·바이오기업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국내 낮은 약가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제약사가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신약개발에 성공하더라도 후속 개발을 위해서는 기업의 개발의지와 자금 투자를 유도할 정부의 지원책이 필요하다. 그 중 하나가 약가우대인데 적절한 보상이 없는 약가는 신약개발 의지를 낮추고, 글로벌 제약사와의 경쟁에서도 수익성이 떨어져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신약 약가는 기존 시장에 출시된 대체가능 약제들의 가중평균가(총 판매액을 판매량으로 나눈 값) 90% 수준에서 결정된다. 복제약 보다 헐값으로 책정되는 구조 탓에 신약개발 동기가 사라지고, 제약바이오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약업계는 국내 약값은 해외에서도 참조하는 가격으로 낮게 약가가 책정되면 수익성이 낮아져 신약 수출이 무산되거나 아예 국내에서 약값을 받지 않고 해외에서만 출시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출시한 신약의 허가를 취소하는 사례 등도 발생해 국산 신약, 국산 원료를 사용한 완제의약품의 약가우대가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통상 마찰과 건강보험 재정을 이유로 들며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는 바이오의약품 등 생명공학 분야에서 미국 내 연구·제조를 우선시 해 자국 산업을 지원하겠다는 미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최근 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자국 내 제조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국가 생명과학 및 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자국 제약바이오산업 보호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2018년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국내 제약사 개발 신약 우대가 형평성을 해친다고 주장하며 사실상 약가우대 제도 폐지를 이끌어낸 바 있다. 국내 제약바이오업계로부터 비난에도 통상 마찰을 우려한 정부가 해당 조항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당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글로벌 혁신신약 약가우대제도 개정에 대해 국내 기업들의 반발은 인지하고 있지만, 이는 미국 측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차별성 없는 조항을 만들기 위한 조치였다”고 해명한 바 있다.
이후 정부의 주요 제약바이오산업 지원 정책에서 약가우대 방안은 찾아볼 수 없다. 지속적인 국내 제약바이오기업들의 약가우대 요청에 ‘특정 기업에 대한 지원은 통상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며 신중히 접근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 상황에 원료의약품 수급이 어려워지자 자급률 확보를 위해 약가우대가 필요하다는 업계의 요청에도 ‘건강보험 재정, WTO 협정 및 주요 FTA 협정(한‧미 등) 위반 등 통상문제, 보험약제의 안정적 공급 및 품질관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일본의 경우 다른 나라에 앞서 최초로 허가된 신약에 대해 우선도입가산 10 ~ 20%를 적용하고, 일본 내 임상시험 실시 횟수 등이 많은 기업의 신약에 대해 해당 제네릭 등재 또는 등재 후 15년까지 사후 약가 인하를 면제하고 있다. 대만 역시 자국에서 안정성과 유효성을 입증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임상시험을 진행한 신약의 경우 가산 10%를 적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부는 바이오헬스 등을 소위 Big3 산업으로 지정하여 경쟁력 확보를 위해 중점 육성 및 지원방안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한미FTA 통상문제와 무관한 혁신형 제약기업이 제조한 의약품에 대한 건강보험 요양급여비용 상한금액 가산 등 약가를 우대하도록 하는 ‘제약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정부가 하위법령을 마련하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라며 “혁신형 제약기업의 제네릭 약가 우대 규정만 있을 뿐 신약에 대한 약가 우대 규정이 없어 신약보다 제네릭 개발을 장려하는 모순적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혁신형 제약기업 중에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포함돼 있어 통상 분쟁 방지가 가능하고, 대체약제 시장가격의 100% 수준으로 약가를 우대한다 하더라도 추가적인 건강보험 재정 소요 없이 혁신형 제약기업의 인증 우대 효과가 강화될 수 있다”며 “일본과 대만에서도 최초로 허가된 신약과 자국 내 임상시험을 실시한 기업의 신약에 대해 약가를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정부는 개정 제약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의 약가 우대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시행령 등 후속입법을 추진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제약업계에 따르면 혁신형제약기업의 약가우대 하위법령을 마련하겠다고 정부가 진행한 ‘국제 통상질서에 부합하는 혁신형 제약기업 약가지원 방안 연구’ 또한 작년 말부터 진행, 이미 결과보고서가 지난 5월 제출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과가 수개월째 공표되지 않아 업계의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 제약바이오업계 관계자는 “제약바이오산업을 국가의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포부는 거창했지만 통상 문제에 제대로된 약가우대 지원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며 “지나치게 미국 눈치보기에 급급하면 앞으로도 정부의 지원책은 알맹이가 빠져있을 것으로 우려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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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 원장은 “혁신형 제약기업에게 연구 투자에 대한 약가를 우대해 줬는데 미국의 이의제기에 바로 삭제했다. 당시 통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외국 기업에도 혜택을 줬는데 적극 방어하지 못했다”라며 “약가 우대 제도를 부활한다고 하는데 쉽지 않을 것이다. 혁신형 제약기업에 다국적 제약사도 끌어 들여 WTO 제소 이슈 등도 사그러들면 한국에 투자를 많이 하도록 유도하고, 지원해주는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과 관련해서도 “정부의 대책이 늦다. 지난해 미국이 바이오원료나 합성원료에 대해 발표하며 분위기를 보여줬고, 국내에서 관련 연구도 진행했지만 액션은 없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또 발표가 나오니 갑자기 급해진 것 같다”라며 “시간이 흘러갈수록 다른 우방국들에게 빼앗길 수 있어 빨리 미국과 협력방안을 모색해야 하는데 정부는 방안을 완성해 발표하려고 한다. 1차적으로 대책을 발표하고, 다시 의견을 수렴해 2차 대책을 발표하는 등 즉각 조치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