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공간에서 아바타로 다른 이용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디지털 성범죄로 문제 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메타버스 '성범죄'에 대한 법적 정의부터 이뤄져야 피해자가 대응에 나설 수 있다.
메타버스 서비스 형태에 적합한 피해 신고 체계도 도입돼야 한다. 그 동안 게임을 비롯한 온라인 플랫폼들은 이용자 피해 사례와 그에 대한 증거로 텍스트, 음성, 이미지 등을 접수받아 대응해왔다. 피해 사례도 정형화된 편이었다. 그러나 이용자의 자유도가 높고, 실시간 영상의 형태를 띈 메타버스에선 성범죄 피해를 입더라도 기존 신고 체계로 적절히 대응하기 어렵다.
정부는 메타버스 성범죄 현황을 조사해 이용자 가이드라인을 준비하고 있다. 가이드라인이 발간되면 플랫폼들의 문제 대응 능력도 다소 향상될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는 메타버스 성범죄 문제에 대응하려 해도 성범죄에 대한 규정 및 적절한 제재 수준을 정하기 어렵다며, 정부 지침이 나오길 희망하고 있다.
■"아바타로 겪은 성적 괴롭힘도 성범죄"
메타버스는 몰입감 높은 경험을 제공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런 특징을 살려 유용한 서비스들도 구현될 수 있지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겪으면 다른 인터넷 서비스보다 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메타버스에서의 성적 괴롭힘은 이용자가 아닌, 아바타가 그 대상이라는 이유로 성범죄 적용을 받지 않는 상황이다.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는 메타버스 성범죄를 검토해 이런 문제를 개선할 권고안을 지난 1월 발표했다. 해당 권고안은 헌법 상 기본권인 인격권에 포함된 '성적 인격권'을 독립된 보호법익으로 설정하고, 그에 대한 침해 행위를 범죄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계정, 아바타 등 인격을 상징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런 행위가 이뤄질 경우 성적 인격권을 침해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회도 메타버스 성범죄가 법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결책을 도모하고 있다.
지난 6월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메타버스 성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개정안 5건을 발의했다. 현재 비성범죄로 다뤄지는 언어 기반 성적 폭력 및 괴롭힘을 성폭력으로 명문화하고, 정보통신망법 상 유통을 금지하는 불법정보로 '아바타 등 사람의 인격을 표상하는 대상에 성적 언동을 하는 내용의 정보'를 추가하는 조항을 넣었다.
지난달 윤영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성범죄를 비롯한 메타버스 상의 권리 침해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명시했다. 상대방 의사에 반해 아바타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행위, 정당한 이유 없이 아바타의 진로를 방해하는 행위 등에 대해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규정을 담았다.
여성가족부도 지난 6월 발표한 '제4차 청소년 보호종합대책'에 따르면 메타버스 성범죄를 비롯한 비윤리적 행위에 대응하는 법제 정비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메타버스' 맞게 피해 신고 체계 다듬어야
개발사의 의도한 대로만 아바타가 행동하고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타 플랫폼과 달리, 메타버스는 실제 현실에 준하는 자유도를 지향한다. 이용자의 실제 움직임을 본따 아바타가 그대로 움직이는 플랫폼도 이미 등장한 지 오래다. 이후 기술이 고도화되면 더 높은 몰입감을 지원하는 사례도 나타날 전망이다.
아바타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다양해지면서 디지털 상에서 나타나는 성범죄의 맥락과 유형도 다양해지는 점이 문제다. 특정 단어 발화를 금지하는 식의 단순한 규제로는 메타버스 성범죄를 적발하기 어렵다. 아바타의 행위 위주로 성적 괴롭힘을 당한다면 화면 영상을 녹화하지 않은 이상 증거를 남기기도 쉽지 않다. 그마저도 제3자가 불쾌함에 공감할 수 있을 만큼의 맥락이 드러나야 한다.
플랫폼사들이 메타버스의 이런 특성을 염두해 이용자 신고 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메타버스 플랫폼 자체도 대두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용자들도 이런 문제를 대응하는 데에 익숙치 않은 상황이다. 플랫폼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피해 신고를 유도하는 노력도 수반돼야 한다.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를 운영 중인 네이버제트의 한기규 대외협력팀 리드는 지난달 31일 열린 ‘메타버스 내 성범죄 실태와 대책’ 토론회에서 "대응 조치의 일환으로 '팔로우' 여부에 따라 타 이용자에 대한 설정을 달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지만, 아동 이용자들은 이런 부분을 잘 모르거나, 이런 설정에 익숙치 않을 수 있다"며 "신고 프로세스에 대해서도 인식이 부족하다"고 언급했다.
다만 이를 법으로 규제하기보다는, 업계가 자율 규제 마련을 추진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입법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메타버스 산업이 주목받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자칫 섣부른 규제가 산업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다.
정준화 국회 입법조사처 과학방송통신팀 조사관은 "법안들이 바람직한 취지로 발의됐지만 메타버스 이용자가 아동, 청소년인 경우 이용 상황이 녹화되도록 하거나 다른 이용자 아바타의 밀접한 접촉을 차단하는 등, 플랫폼들의 자율적 협조를 이끌어내 취할 수 있는 해결책들도 있다"며 "메타버스 산업이 초반이기 때문에 이용자가 긍정적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당국과 국회, 산업계가 적극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메타버스 범죄에 대한 이용자 처벌을 법제화하는 것은 성급한 조치로 보인다"며 "벌금, 징역형을 규정하는 형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상 행위가 굉장히 구체화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형사처벌 규정을 만들지 않더라도 메타버스 플랫폼이 문제 행위를 한 이용자를 일정 기간 차단하는 식으로 조치한다거나, 메타버스에서 지켜야 할 규칙도 이용자들이 자율적으로 논의해 마련하고 적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메타버스 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용자 피해가 주로 무형적인 것인 만큼, 규제도 메타버스에 맞는 형태로 도입되는 게 적절해 보인다"고 의견을 냈다.
■정부 실태조사 토대로 플랫폼 대응 고도화 전망
현재 국내외 플랫폼들이 메타버스 성범죄 문제에 대응하는 조처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다. 플랫폼 내에서 고객센터에 접근할 수 있도록 UI를 개선하거나, 근거리에 타 아바타가 접근할 수 없게 하는 등의 설정을 취하는 식이다.
메타버스 성범죄가 법적으로 문제시되지 않고, 신고를 접수하는 체계도 미비한 점이 있다 보니 피해 현황에 대해서도 업계와 정부 모두 알려진 사례만 인식할 뿐, 구체적으로 파악하진 못하고 있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도 막막한 상태다.
이에 올초부터 정부 부처는 메타버스 범죄 이슈를 살펴보고 필요한 정책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1월 방송통신위원회는 메타버스 이용자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메타시대 디지털 시민사회 성장전략' 추진단을 출범했다. 추진단을 통해 메타버스를 이용한 성범죄나 폭력, 유해 정보 유통 외 신유형 범죄 등을 다루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메타시대 디지털 시민사회 성장전략 발표 시기는 연말로 잡고 있다.
추진단 운영 상황에 대해 방통위 관계자는 "현재로선 성범죄, 재산권 침해 등 범죄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행위의 범위를 아직 특정하기 위해 메타버스 이용자, 창작자 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실시하고 있다"며 "산업이 초기 단계이다 보니 어떤 규제 모델을 어떤 방식으로 도입해야 할지에 대한 방침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여성가족부도 이용자 자율규범 '메타버스 윤리원칙'을 마련할 계획이다. 관련 브리핑에서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은 "정부가 메타버스 아바타에 대한 인격권 부여 여부를 확정한 건 아니다"라며 "새로운 현상으로서 메타버스 아바타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는 정립이 필요한 사항"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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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 "아바타도 성범죄 대상"...법적 해석 확대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