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없이 살수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반도체는 이제 사회와 산업의 생명수이자 권력입니다. 모든 것을 움직이고 연결시킬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멈추고 파괴시킬 수도 있습니다. 1960~70년대 노동집약적인 우리 경제를 첨단·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탈바꿈시킨 반도체 산업이 이제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과 4차산업 혁명 속에 새로운 전환시대를 맞았습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국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생태계 확장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지디넷코리아가 창간 22주년을 맞아 '반도체가 미래다' 시리즈를 3부에 걸쳐 연재합니다. 우리 수출산업의 첨병을 넘어 경제안보 자산으로 평가받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를 면밀히 짚어보고, 무엇을 준비하고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그 방향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1부: 세계는 반도체 전쟁
2부: 한국 반도체 신화는 계속된다
3부: 전문가에게 듣는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일 삼성전자 평택 공장에서 회동해 양국간 '반도체 동맹'을 선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방문의 첫 행선지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택하면서 사실상 동맹국 중심의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위해 추진하는 '칩4(한국-미국-일본-대만) 동맹'에 한국의 동참을 이끌어 낸 셈이다. 또한 자국 내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지어질 삼성 반도체 공장을 간접적으로 대외에 알리면서 11월 중간 선거에 대비한 효과까지 얻었다.
한국은 이번 동맹을 통해 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는 핵심국가이자 선진국이라는 이미지를 쌓으면서 글로벌 신뢰도를 탄탄히 구축하게 됐다. 반도체 기술 발전과 고객 유치, 투자가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중국의 추격으로 인해 국내 업체들이 피해가 우려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 미국,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 목표…자국 내 생산 늘린다
반도체 공급 부족이 장기화되고 4차산업혁명으로 인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반도체 동맹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국 중심의 '공급망 확보'다.
안진호 한양대학교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미국이 자국 중심의 공급망 안정성 확보를 위해 미국 편의 진영을 만드는 움직임이 이번 방한으로 확실해졌다"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미국을 도와 달라는 동맹인데, 이는 비단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다른 나라와 산업들도 마찬가지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또 "기존 반도체 산업은 저렴하고 좋은 제품을 대외구매(소싱)하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추구했다면,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코로나 바이러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면서 로컬라이제이션(자국 내 공장 운영)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자국 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미국 중심의 공급망 확보의 일환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시에 170억달러(약 21조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연내에 착공할 예정이며, TSMC도 애리조나주에 120억달러(14조3천400억원) 규모의 5나노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 한국, '반도체 핵심국가 신뢰 구축'으로 글로벌 고객사 확보
한국이 미국과 반도체 동맹을 통해 얻게 된 이점은 세계적으로 '반도체 핵심국가'라는 신뢰도 구축이다. 해외 기업들이 반도체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떠 올리는 국가가 한국이고,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된다면 한국 반도체 관련 기업들은 글로벌 고객사 유치는 물론 투자와 생태계 구축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것으로 기대된다.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은 최대 공급자이며, 미국은 한국의 최대 고객사다. 미국이 전세계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계 팹리스 기업(반도체 설계)의 매출 중에서 미국은 68%를 차지했으며, 톱10 팹리스 중 퀄컴, 엔비디아, 브로드컴, AMD, 마벨 등 거물 기업 6곳을 보유하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 2위인 삼성전자(점유율 18%)가 1위 TSMC(점유율 52%)를 따라 잡기 위해서는 팹리스 고객사와 수주 물량을 늘리는 것이 핵심 관건이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한미 반도체 동맹은 양국 간 신뢰를 구축하는 단계"이라며 "신뢰 관계를 통해 한국이 고객사를 확보하는데 매우 유리해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은 반도체 동맹을 발판삼아 반도체 공급자로서 기술 개발과 시설 투자를 적극적으로 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안진호 교수는 "최근 일본과 미국, 미국과 대만, 대만과 일본이 반도체 얼라이언스를 활발히 구축했지만 그동안 한국은 소외돼 왔다"며 "이번 한미 동맹을 통해 한국이 왕따 분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고 전했다.
아울러 이번 동맹으로 한국은 지속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반도체 장비와 원료 등을 안정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게 됐다는 점도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미국은 최첨단 반도체 장비와 설계자동화툴(EDA)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반도체 장비 톱5 중 3곳(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KLA)이 미국 기업이다. EDA 또한 미국 기업인 시놉시스(점유율 33%), 케이던스(23%) 등이 시장을 과점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최첨단 기술과 장비를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기에 지속적인 미국과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미국이 중국에 반도체 장비와 EDA 공급을 막아 반도체 생산에 지장을 준 사례가 있듯이, 동맹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안정적인 공급을 약속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韓 기업, 中 비즈니스 차질 우려..."미국에 자국 기업과 동등한 인센티브 요구해야"
이번 동맹으로 국내 기업의 중국 비즈니스에 차질이 생길 수 있어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중국 입장에서는 '반중 연대'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황철성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석좌교수는 "우리나라의 반도체 제품 수출의 50% 이상을 중국이 차지한다"며 "이번 동맹이 삼성을 제외한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 기타 업체의 중국 비즈니스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황 교수는 또 "지난 2년간 미국이 자국 반도체 기업에게 중국 수출을 못하게 하면서 중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일부 국내 장비 업체에게 기회가 온 상황"이라며 "이번 동맹으로 중국 비즈니스가 막히게 되면, 장비 업계에 피해가 생길 확률이 높을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동맹관계를 구축할 때는 반대급부가 무엇인지 따져봐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한국이 얻게 되는 이익에 대해 구체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안기현 전무는 "이번 동맹은 장비 업체와 크게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놨다. 안 전무는 "국내 장비 업체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다"며 "반도체 장비 시장 또한 숏티지로 인해 국내 수요도 제대로 공급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으로 수출할 수 있는 양이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미국에 자국 기업과 동등한 인센티브를 요구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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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호 교수는 "동맹은 신뢰 구축을 의미하며, 구체적인 사항을 요구하기엔 어려운 일"이라며 "대신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우리나라 기업에게도 미국 기업과 차별 없이 동등한 인센티브 지급과 안정성 확보를 요청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한편 미국 상·하원은 올해 2월 자국 내 반도체 생산력 증대를 위해 520억달러(약 65조8천억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 법안(CHIPS for America Act)'을 통과시켰다. 또 미국은 150억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지원 법안도 추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