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도 진화한다. 상충될 것 같아 보이는 규제와 서비스가 접점을 이룰 때 새로운 가능성이 도출된다는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요즘 심심찮게 나온다. 최근 주목받는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 이야기다.
규제과학의 개념은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정의는 대략적으로 규제기관이 규제하는 제품들의 안전성과 유효성, 품질 및 성능 등을 평가키 위한 새로운 도구와 기준, 접근을 개발하는 과학을 의미한다. 규제과학연구원(KFDC)은 규제과학을 두고 법령·정책·과학의 공존 혹은 혼종이란 위트 있는 설명을 내놓는다.
전문적인 설명을 더하면, 규제과학은 “위험의 평가와 기준의 설정과 같은 규제를 위한 연구수행과 관련 지식들을 생산하는 과학 활동”이다. 서경원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장은 “적절한 규제를 훼손하지 않되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규제과학은 바이오헬스 영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의 건강과 삶의 질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의약품·화장품·의료기기·식품 등 분야는 규제과학의 핵심으로 꼽힌다. 혁신제품과 규제와의 격차를 줄이고 제품의 혜택을 국민이 빠르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데 있어 주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신종 감염병 팬데믹 상황에서도 규제과학은 대응 의약품 확보를 위한 필수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규제과학에 ‘꽂혀’ 있다. 지난 2014년 식약처는 의약품 규제과학 전문가 과정을 위탁 추진했다. 당시만 해도 규제 업무 전문가 양성에 초점이 맞춰진 인재양성 교육이었다.
코로나19는 국내 규제과학 구축에 있어 중요 계기가 됐다. 2019년 5월 식약처는 규제과학 연구 기능 강화 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정부는 이듬해 12월 ‘식품의약품 등의 안전기술진흥 기본계획’에 따라 오는 2025년까지 규제과학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김강립 식약처장은 “코로나19 기간은 규제과학 및 식약처 주관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며 “규제가 안전성·효과성 검증에서 적극적인 역할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밝혔다.
대표적인 것이 식약처는 코로나19 초기 셀트리온의 항체치료제 ‘렉키로나주’ 검증을 40일 만에 끝낸 사례다. 반면, 해외 규제기관에서 동일 치료제의 검증에 소요된 시간은 10개월여. 검증 결과는 식약처와 같았다.
김 처장은 “각종 백신에 대한 국내 검증 결과가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해 국제사회에서 통용된 점은 주목해야 한다”며 “코로나19 기간은 제품 개발·기획·연구를 맡는 산업에 어떤 서비스 제공 여부에 따라 동반 성장이 가능한지를 재발견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후 식약처는 작년 5월 규제과학 발전 전략에 이어, 규제과학 인력 양성 사업을 출범시켰다. 올해 4월 1일 식약처는 한국규제과학센터를 설립한데 이어 같은 달 25일 식약처내 ‘제품화전략지원단’을 구축했다. 관련해 박정태 한국규제과학센터장은 “규제과학 발전은 국민보건 향상과 바이오헬스 역량 강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했다.
이형기 서울대병원 임상약리학과 교수는 “코로나19는 규제기관이 과거 하지 않은 방식으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경험을 제시한 계기”라며 “새로운 형태의 규제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식약처가 지난달 25일 출범시킨 ‘제품화전략지원단’이나 최근 출범한 ‘한국규제과학센터’는 규제를 바라보는 바뀐 시각의 결과다. 김강립 식약처장은 “완성된 제품의 검증에서 규제의 리스크를 덜어내고 완성도 높은 제품화 발전을 위해 식약처의 지원을 고민하는 조직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 바이오헬스 업계도 규제과학 적극 도입 ‘환영’
“규제기관이 관련 분야를 선도하지 못하고 따라가는 데 급급한 점이 아쉽다.”
코로나19 이전 바이오 분야에 종사하는 한 연구원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일 전 이 연구원은 기자에게 정부가 ‘규제과학’에 관심을 쏟고 있다고 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규제과학 추진 슬로건으로 내건 ‘추격에서 선도’. 이를 바라보는 업계의 분위기는 ‘환영’이다.
3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최된 ‘제4회 규제과학 혁신포럼’에서 웰트 강성지 대표는 “산업계 입장에서 규제는 산업의 수준을 높여주는 모의고사와 같은 역할”이라며 “규제란 잣대를 넘어서기 위해 산업 수준을 높이는 게 바로 규제의 순기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책임을 정부가 지고 해당 제품은 안전하다고 끝내는 게 아니라 어느정도 자율성을 부여하고 기업이 책임지게 할 필요가 있다”며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게임과 자율주행 등 ICT 기업들이 추진하려는 방향을 규제의 방법론에 대입하려는 실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형기 교수는 필요한 규제과학이 없다면 우수한 신제품을 개발해도 시장진입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ICT 기술과 접목한 바이오헬스 제품 개발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결국 식약처가 규제과학 심화를 위해 더 많은 역할을 요구받을 것은 자명하다. 서경원 원장은 ▲신기술 제품의 시장 진입을 위한 지원 ▲국가 R&D 제품화를 위한 규제 정확성 ▲식약처 인력 전문성 강화 ▲식약처 R&D 예산의 규제과학 발전에 사용 등을 앞으로의 과제로 짚었다.
물론 의약품과 의료기기 등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제품 등 요소에 대한 규제는 양보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규제과학을 ‘규제 간소화’로 오해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김강립 식약처장은 “그렇지만 규제가 아이디어의 창출을 막는 것이 아닌 새 제품 개발로 우리 국민이 건강을 지키고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데 방점을 둬야 한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는 규제과학에 관심을 갖고 있을까? 서경원 원장은 “새 정부에서도 바이오헬스 산업에서 규제 과학의 중요성을 인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