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20일부터 “IT는 포스트 노멀 시대의 나침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연재(격주, 화요일)해 왔던 칼럼이 삼부능선을 넘었다. 필자는 연재를 시작하며 먼저 오래된 규칙을 의심하고, 다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양면성을 살피며, 마지막으로 질문을 통해 불확실한 미래를 개척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지난 10회의 연재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동기 부여, 그리고 ▲리더십을 중심으로 저물어 가고 있는 노멀 시대의 규칙을 의심해 봤다.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동기 부여에 대한 의심
곰처럼 힘이 세지도, 사자처럼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갖지도, 또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타거나, 치타처럼 빨리 달리지도 못했던 인간은 생존을 위한 방법으로 관계를 선택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을 것이다. 분절적 언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 인지 혁명은 그저 진화의 결과라기보다는 어느 날 분절적 언어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돌연변이 인류가 그렇지 못한 인류를 멸망시킨 결과였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시작됐던 커뮤니케이션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위계’라고 할 수 있다.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 위에 올라탄 인류가 모두 사공을 자처한다면 생존이라는 목표를 향해 제대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변덕스러운 바다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고, 배를 띄어본 경험이 가장 풍부한 사람에게 사공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모두의 생존을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생존을 위해 사공이라는 리더의 입장과 승객이라는 멤버의 입장으로 나뉘게 됐다.
독일의 새로운 철학 병기로 떠오르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의 말처럼 모든 사회 체계는 나름의 필요성에 의해 출발하고 분화하지만, 종국에는 각자의 확대 재생산에만 몰입한다.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류의 목표는 생존에서 다양한 이익으로 분화됐다. 사공 또한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배를 몰아가면서 커뮤니케이션은 그것이 애초에 시작됐던 목적을 상실한 채 기울어진 운동장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효율성만을 추구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사공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더 많은 사람을 배에 태워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도와줄 선원들이 필요했다. 이제 사공은 자신의 이익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선원들에게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다. 이른바 ‘동기 부여’가 시작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의심하고 주저하기
가로등 불빛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취객과 경관. 경관은 취객에게 묻는다. "정말 여기에 잃어버린 게 맞소?"취객은 말한다. "여기가 아니라 저긴데, 저긴 가로등이 없어서 못 찾아요." '선의'를 갖고 돕던 경관은 취객의 '지휘' 아래 헛된 일만 한다. 혹시 우리도 '프레임'의 강렬한 불빛에 현혹돼 엉뚱한 곳만 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상진 ‘세대 게임’ 중에서)
서강대 사회학과 전상진 교수는 ‘세대 게임’에서 파울 바츨라비크의 우화를 소개하며 빠른 시대 변화로 인해 첨예해지고 있는 세대 갈등을 프레임의 문제라고 '진단'했다. '노멀'이든 '뉴노멀'이든, 아니면 '포스트 노멀'이든 주장하고 확신하기 이전에 선행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진단이다.
현대의학이 과학혁명을 바탕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배경에는 현미경의 발명이 있었다. 인류는 현미경을 통해 질병의 원인이 신의 저주가 아니라 미생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이것이 현대 의(료과)학의 토대가 된 진단의학의 시작이다. 의사는 환자가 가진 질병에 대한 '진단'을 바탕으로 어떻게 치료할지 판단하는 '처방'을 한다. 단순한 소화불량을 위암으로 진단한다면 정상적인 치료 행위는 불가능할 것이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이렇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진단을 선행해야 한다. 현대의학의 관심은 이제 진단과 처방의 단계를 넘어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예방' 의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들여다보는 사회과학은 자연과학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하다.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객체는 주로 상수화 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객체인 인간은 쉽게 상수화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1999년 호주의 뉴 사우스 웨일즈 대학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리처드 테일러(Richard Taylor)' 박사가 '잭슨 폴록'의 그림에서 프랙털의 규칙을 밝혀낸 것처럼 자연의 규칙은 아무리 복잡해 보이더라도 증명 가능한 영역에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현재 쥐고 있는 손을 계속 쥐고 있을지, 아니면 펼지는 연구를 통해 증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의 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처방)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진단하기는커녕, 주관적 신념을 바탕으로 미래를 확신(예방)함으로써 오히려 변수를 증폭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사회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면 개인적 경험이나 주관적 신념에 기초한 확신을 거두고 먼저 당연하다고 여겨온 모든 것을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진단을 위한 새로운 도구, IT
인류는 마침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었다. 바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Information Technology’다. 얼마 전까지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장 유용한 수단 중 하나는 통계였다. 통계의 목적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계에서 데이터는 그저 대상일 뿐이다. 반면 IT는 데이터 생산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IT는 골칫거리일 수도 있는 데이터를 보다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 서비스는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자신의 플랫폼 안에서 더 편하게 데이터를 생산하게 할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가장 편하게 데이터를 생산할 수 있는 플랫폼이 IT 세상의 지배자가 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구글과 카카오라고 할 수 있다. 구글과 카카오는 시장에서 물건을 팔지 않으면서도 시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온라인 플랫폼이다. 구글링은 아예 검색을 의미하는 단어가 됐으며, 카카오는 대한민국의 인터넷 시대를 열었던 다음과 네이버가 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구글과 카카오가 성공한 이유는 질 좋은 콘텐츠를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어떤 플랫폼보다 쉽고 간편하게 새로운 데이터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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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전화를 통해 걸려 오는 설문 조사는 무시하지만,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검색과 좋아요를 통해 개인의 취향을 일상적으로 노출한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은 대중들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통계보다 빅데이터 분석을 선호한다. 통계를 목적으로 수집되는 질문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자발적으로 생성하는 데이터는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단지 수집과 분석과 해석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꼭꼭 숨겨져 있던 개인의 생각을 마음껏 데이터화할 수 있도록 끄집어냄으로써 데이터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있다는 것이 바로 IT가 갖고 있는 무궁한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갖고 있는 양면성
IT가 진보하는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것들이 낡은 것들을 대체해 가고 있다. 사실 대체는 익숙함을 기준으로 익숙하지 않은 것을 부정하기 위해 시작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소멸시키기 위해 시작됐을까? 비대면(온라인)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면 대면(오프라인)의 쓸모는 완전히 사라질까? 사적 존재에서 출발해 공적 존재가 된 인간이 공과 사를 완벽하게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소크라테스는 선(Agathon)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악(Kakon)을 동원했다. 어쩌면 우리가 대체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부족한 동시에 자기 완결적인 존재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앞으로 연재할 2부에서는 우리가 대체 관계로 인식해 왔던 많은 개념들이 사실은 서로 보완 관계에서 출발했으며, 대체가 아닌 보완이 만들어 갈 더 큰 효율에 주목하고자 한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