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흐름에 따라 전기차 수요가 늘어나면서 핵심 부품인 배터리도 고성장세에 접어들었지만, 폐배터리 만큼은 주목할 대상이 아니었다. '쓰다 버린 배터리'란 이미지도 한 몫을 했지만, 환경·안전상의 이슈로 전기차 폐차 시 배터리를 무조건 반납해야 하는 규제 때문이었다.
다만, 관련 규제가 폐지되면서 폐배터리 시장이 크게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배터리 수급난에 허덕이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업계가 먼저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배터리라도, ESS용 배터리로는 활용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안전성과 효율성이 검증되는 대로 완성차 업계도 폐배터리 폐기에 따른 환경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전망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10일 한국수력원자력과 함께 전기차배터리와 재생에너지를 연계한 실증사업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전기차에서 회수한 배터리를 재생에너지 연계 ESS에 활용해보는 사업인데, 세계 최대 규모인 3기가와트시(GWh)급 폐배터리 재사용 ESS 보급 사업 추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車배터리론 가치 없지만 ESS 활용 가능성은 충분
전기차 배터리의 초기 대비 용량이 80% 이상 감소하면 교체 대상인 폐배터리가 된다. 다만 이는 성능 기준이 높은 '전기차 배터리'용 가치가 떨어진 것일 뿐, ESS 배터리 활용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게 중론이다. 미국국립재생에너지연구소(NREL), 독일재생에너지협회(BEE) 등에 따르면, 7~8년간 사용한 전기차 배터리를 재활용할 경우 초기 용량의 70~80% 수준에서도 10년을 사용할 수 있다.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는 차량 가격의 40%를 차지하는 고부가 가치 부품으로 이뤄져 있어 활용도 역시 무궁무진하다. 이미 등록된 자산이어서 회수와 물량 확보가 수월하고, 신규 배터리 대비 가격이 낮다는 것도 재활용 전기차 배터리의 장점이다.
무엇보다 전기차 폐배터리 활용 산업은 향후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됨에도, 성능평가나 재사용 방안에 특별한 기준이 없는 틈새시장으로 꼽힌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전기차에서 수거한 배터리 팩(Pack)을 분해해 배터리 상태 진단에 들어간다"며 "이후 동일한 성능의 배터리로 분류한 다음 ESS용 배터리 트레이로 재가공하는 공정"이라고 말했다.
높은 수요에 반해, 국내에서 폐배터리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였다. 환경부가 지난 6일 발표한 수입 금지 폐기물 항목에서도 폐배터리는 원료 가치가 높고 수급이 어렵단 이유로 폐금속, 폐전자제품 등과 묶여 제외됐다.
재생에너지 업계 한 관계자는 "전기차 가격이 높은 이유는 원가의 절반 비중을 차지하는 배터리인데, 가격이 높아 수급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특히, 전기차 폐배터리는 이미 등록된 자산이기 때문에 회수가 어렵지 않고 신제품보다 가격도 낮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수요 폭발하는 전기차…10년 뒤 폐배터리 8만개 쏟아진다
사업 가능성이 열린 건 규제 샌드박스로 선정된 폐배터리 재사용 사업이 실증 특례 승인을 통과하면서다. 대한상공회의소 샌드박스지원센터와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0월 개최한 '산업융합 샌드박스 심의위원회'에서 전기차 배터리 재활용 기술에 대한 실증특례를 의결했다. '전기·전자제품·자동차 자원순환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점도 유효했다.
시장 전망도 매우 밝다. 우선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는 전기차 수요가 연평균 19%의 성장을 지속, 10년 뒤인 2030년엔 자동차 시장에서 30%의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다른 시장조사업체 리포트링커는 2030년까지 배터리 재활용 시장이 연평균 18.3%씩 늘어날 것으로 관측했다.
전기차 폐배터리는 내년 이후 발생량이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그린뉴딜과 '2050 탄소중립' 추진에 따라 친환경차 보급이 활성화하면서 국내 전기차 누적 보급대수는 2025년 113만대, 2030년 300만대로 늘어나게 된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지난해 4천700개에 불과했던 전기차 폐배터리는 2030년까지 8만개 규모로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수요처인 ESS 시장도 함께 성장 중이다. 블룸버그 뉴에너지 파이낸스(BNEF)에 따르면 2017년 3기가와트아워(GWh) 수준이었던 ESS 시장은 2040년 379GWh 수준으로 약 128배 성장할 전망이다. 이는 오는 204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40%까지 확대될 것을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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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는 한수원 외에도 파워로직스, OCI, 한화큐셀 등 배터리·재생에너지 업계와 협업 중이다. 파워로직스는 현대차 폐배터리를 재활용하는 ESS 생산을 맡았다. OCI는 현대차 폐배터리를 활용한 ESS를 구축해 신규 배터리와의 성능을 비교 중이고, 한화큐셀도 현대차와 폐배터리 기반 ESS 공동 개발에 나섰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전기차에서 회수한 배터리의 친환경성을 제고하는 것은 물론 태양열·수력·풍력·조력·지열 등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과 활용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실증을 통해 수집·분석되는 데이터는 국내 인·허가 규정을 정교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