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50 탄소중립(Net Zero·넷제로)' 달성을 위해 기업의 에너지전환을 유도하는 재생에너지 거래 플랫폼을 내놓았다. 사용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글로벌 캠페인인 'RE100'을 국내 실정에 맞게 도입하겠단 것인데, 전기사용량 기준도 없고 부담스러운 '재생에너지 100% 선언'도 필요치 않아 문턱을 낮췄다는 평가다.
주목할 점은 한국전력공사가 독점해온 전기공급 제도를 깨뜨려 전기소비자가 재생에너지를 선택적으로 구매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제도 활성화를 위해선 한국전력의 중개 없이 전기판매자와 구매자 간 전력구매계약이 가능하도록 전기사업법이 개정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석탄발전 등에 대한 환경비용도 높게 책정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기업 등 전기소비자가 재생에너지 전력을 구매해 사용할 수 있는 '한국형 RE100(K-RE100)' 제도를 올해 본격 도입한다고 5일 밝혔다.
"전력 100% 재생에너지로"…기업들 참여할 길 열렸다
RE100은 기업의 사용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글로벌 캠페인인데, 현재 전세계 280개 이상의 기업이 참여 중이다.
국내에서도 RE100 참여를 원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SK그룹 6개사(㈜SK·SK텔레콤·SK하이닉스·SKC·SK머티리얼즈·SK실트론)가 국내 기업으론 처음으로 RE100에 가입하기도 했다. (☞SK그룹 6개사, RE100 회원 명단에 올랐다) ㈜SK는 2030년까지, 나머지 5개사는 2050년까지 사용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키로 약속했다.
글로벌 RE100 캠페인은 연간 전기사용량이 100기가와트시(GWh) 이상인 기업만이 참여 가능하다. 즉,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그동안 RE100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에 정부는 이번 K-RE100 도입을 통해 RE100 참여를 희망하는 기업의 선택 폭을 넓혔다. 전기사용량 수준과 무관하게 한국에너지공단 등록을 거치면 참여가 가능하도록 했다.
재생에너지 100% 사용 선언 없이도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도 글로벌 캠페인과의 차별점이지만, 산업부는 참여기업에 글로벌 캠페인 기준과 동일한 2050년 100% 재생에너지 사용을 권고했다. 2050년까지 중간 목표는 참여자의 자율에 맡겼다. 재생에너지 사용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에너지원은 태양광·풍력·수력·해양에너지·지열에너지·바이오에너지로, 이 또한 글로벌 기준과 같다.
기업 사용 전력량 전체 절반 넘어
정부가 기업의 사용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체 전력에서 산업용 전력의 비중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한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을 기준으로 산업용 전력 판매량은 2만2천623GWh에 달했는데, 이는 전체 판매량(3만9천65GWh)의 58% 수준이다. 같은 기간 주택용 전력 판매량은 5천766GWh에 불과했다. 글로벌 RE100 캠페인에 참여하는 SK그룹 6개 관계사의 사용 전력만 보더라도 연간 31테라와트(TW) 규모로, 국내 전력 사용량의 5% 수준이다.
K-RE100 추진을 위한 이행방안도 나왔다. 가장 주목받는 것은 '녹색 프리미엄'이다. 재생에너지 생산전력 구매를 원하는 전기소비자가 전기료와는 별개로 납부하는 금원이다. 납부액에 해당하는 '재생에너지 사용확인서'를 에너지공단으로부터 발급받으면 RE100 인증에도 활용이 가능하다.
한전에 따르면 올해 녹색프리미엄 판매물량은 총 1만7천827GWh, 입찰 하한가는 1킬로와트시(kWh)당 10원으로 책정됐다. 녹색 프리미엄은 매월 납부하고 재생에너지 사용 확인서는 분기별로 발행될 예정이다. 이렇게 납부된 녹색 프리미엄은 에너지공단이 추진하는 재생에너지 투자사업의 재원으로 활용된다.
"'제3자' 아닌 자유 PPA 가능해야"
상반기 내에 도입될 제3자 전력구매계약(PPA)으로도 K-RE100에 참여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와 한전, 전기소비자 간 전력구매가 가능한 제도다. 1메가와트(MW) 초과 생산전력에 한해 한전·전기소비자와의 전력공급계약이 가능하다.
다만 제3자 PPA의 경우, 한전이 중개자로 개입하는 방식이어서 소비자의 선택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전력 독점 판매사업자인 한전이 전력구매 과정을 중개하면 이해충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산업부 국감에서도 소비자 간의 자유로운 PPA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를 위해선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전기사업법 개정안 통과가 필요하다. 이 개정안은 재생에너지 전력 공급사업을 전기차 충전과 같은 신(新)사업으로 규정, 발전사와 기업 간 직접 PPA를 허용하는 방안이다.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는 장기 고정계약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할 수 있고, 구매자도 한전의 전기요금 상승이라는 위험부담에 대비할 수 있다.
PPA 활성화를 위해 온실가스 배출원에 대한 환경비용이 충분히 부과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환경단체 기후솔루션은 이날 논평에서 "K-RE100에 참여하는 소비자가 확장되기 위해선, 머지않은 미래에 한전의 전기요금보다 재생에너지 비용이 낮을 수 있다는 확신을 제공해야 한다"며 "배출권거래제 규제 강화, 화석연료에 대한 과세 강화를 통해 환경 비용이 화력발전의 발전단가에 제대로 반영되는 시장 구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韓 탄소중립 이행 가능성에 전세계 주목
한국형 RE100 플랫폼은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정부가 앞서 그린뉴딜 정책과 탄소중립 이행방안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해외에서도 에너지전환 정책의 흐름과 방향성을 대체로 높게 평가하면서도 이를 뒷받침할 이행방안이 더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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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RE100 캠페인을 주도하는 영국의 더 클라이밋 그룹(Climate Group)은 "전세계에서 7번째로 이산화탄소(CO2)를 많이 배출하는 한국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에너지 정책을 전면적으로 점검해야할 것"이라며 "수출 주도 경제국으로서, 한국 정부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급자에게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RE100 추세에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우삼 한국신·재생에너지학회장은 클라이밋 그룹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기업이 한국에서 재생에너지를 조달하기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정부의 탄소중립 발표와 재생에너지 보증제도 도입은 기업의 조달 옵션을 크게 향상시키고, SK그룹 6개사의 글로벌 RE100 캠페인 가입도 신재생에너지 시장과 정부 정책에 큰 신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