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TV도 못 만드는데..." 만류에 한국반도체 인수

과감한 결단 통해 '반도체 불모지' 한국, 세계 최고 반도체 강국으로 일궈

반도체ㆍ디스플레이입력 :2020/10/25 12:38    수정: 2020/10/25 18:14

고(故) 이건희 회장은 1974년 선대회장인 고 이병철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 진출을 건의, 특유의 과감한 결단력을 통해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에 도약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한 공신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당시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반도체가 가능하겠냐"는 경영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재를 털어 자금난에 허덕이던 한국 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해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 모습. (사진=삼성전자)

당시 한국 반도체 공장은 기초 소자인 트랜지스터를 생산하는 수준으로, 해외 선도 반도체 기업들과 비교해 기술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모두가 한국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는 것을 두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으로 치부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끊임없이 부친을 설득하는 동시에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해 불가능한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실현 가능한 현실의 일로 만들었다.

그는 수없이 미국 실리콘밸리를 방문해 핵심 인재 영입을 통한 기술격차 극복에 앞장섰고, 당시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던 미국의 페어차일드를 설득해 삼성전자 지분 30%를 내주는 조건으로 기술이전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77년 12월 30일 ICII가 보유하고 있던 한국 반도체의 잔여 지분 50%를 인수, 이듬해 3월 2일에는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해 본격적인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다.

이 부회장의 주도로 시작된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이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1983년 12월 삼성전자는 64킬로바이트 D램을 자체 개발해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크게 좁히는 데 성공, 1988년에는 적자를 벗어나지 못해 반도체 사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경영진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D램 가격 상승효과로 삼성의 256킬로바이트 D램이 시장을 호령하며 삼성이 그간 투입한 자원(기흥 사업장 시설 투자)보다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업적을 남긴다.

1983년 12월 12일 64킬로바이트 D램 개발 생산 경축 행사 당시 모습. (사진=삼성전자)

1990년대에 들어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고 있던 일본(NEC, 도시바, 후지쯔 등)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8인치 웨이퍼 생산시설(당시 시장 주류는 6인치 웨이퍼)' 구축을 지시하고, 고용량 반도체 생산을 위해 일본과 다른 적층 방식을 선택해 메가바이트 용량의 D램 시대에서 선두업체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기술 강자로 거듭난다.

그리고 1993년, 삼성전자는 마침내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세계 최초 64메가바이트 D램 개발)으로 도약, 지금까지 한 번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1위 자리를 내주지 않는 최강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 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매년 경쟁기업 대비 4~5배 많은 과감한 설비투자와 삼성 특유의 빠른 생산 전개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했지만, 삼성이 글로벌 시장에서 초일류 기업으로 나아갈 방안을 고심하기 시작한다.

1993년 6월, 이건희 회장은 비로소 칼을 뽑는다. 그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알려진 '삼성 신경영'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경영진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한다.

삼성전자 D램 개발 히스토리. (사진=삼성전자)

"불량은 암입니다. 양 위주의 경영을 버리고, 질 위주로 가야 합니다.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야 살아남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그해 초 미국의 한 가전매장에서 구석에 처박힌 삼성전자 제품을 발견하고,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대대적인 혁신을 다짐한다. 일하는 방식부터 제품의 근본적인 품질을 변화 시켜 세계가 감동할 수 있는 초일류 제품을 내놓겠다는 생각에 수억원의 제품을 모두 태워버리는 '불량제품 화형식'도 연다.

권오현 삼성전자 상근고문(전 삼성전자 회장)은 이후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 말씀을 들을수록 그 위기감이 절절하게 느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DNA는 무렵부터 경쟁기업이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 기술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바이트 D램 개발에 성공한 데 그치지 않고, 1994년 256메가바이트 D램, 1996년 1기가바이트 D램을 세계 최초로 연달아 개발하면서 '무어의 법칙'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삼성전자 낸드플래시 개발 히스토리. (사진=삼성전자)

2000년대 들어 삼성전자는 D램에 이어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도 약진을 시작한다. 2002년 낸드플래시 시장 세계 1위에 오른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2기가비트 낸드플래시를 개발, 2003년 4기가비트, 2004년 8기가비트, 2005년 16기가비트, 2006년 32기가비트, 2007년 64기가비트까지 매년 반도체 집적도를 2배 늘리(무어의 법칙)며 '기술중심'의 신경영 전략을 착실히 수행한다.

그리고 오늘날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서 연간 50조원(작년 메모리 사업 기준)의 매출을 내는 세계 최대 규모의 메모리 반도체(D램, 낸드플래시) 기업이자 혁신 기술을 주도하는 반도체 선도 기업이 됐다.

이건희 회장이 한국 반도체 산업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눈부신 발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새겨진 삼성전자 반도체 DNA는 D램과 낸드플래시를 넘어 인공지능(AI), 자율주행, 5G 등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할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또 다른 성장으로 전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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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화성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모습.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 출신 국내 반도체 기업의 한 최고경영자는 이에 대해 "한국 반도체 발전사에 있어 이건희 회장은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라 반도체 불모지 한국이 반도체 산업, 그 자체를 주도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만든 '개척자'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한편, 이건희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 자택에서 쓰러진 뒤 삼성서울병원에서 심장혈관 확장술인 '스텐트 삽입 시술'을 받고 장기 입원 치료를 받아왔지만, 끝내 병상을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