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가 회피한 '디지털세' 논쟁, EU가 되살렸다

유럽 "구글 등이 코로나19 승자…세금 제대로 내야" 압박

인터넷입력 :2020/09/07 15:33    수정: 2020/09/07 19:35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거대 IT기업들은 유럽에서 제대로 된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한동안 주춤했던 ‘디지털 서비스세’ 도입 공방이 또 다시 뜨겁게 달아오를 전망이다. 유럽이 미국 거대 IT 기업들에 대해 “수입에 걸맞은 세금을 납부하라"면서 강하게 압박했다.

대미 공세의 총대를 멘 것은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의 경제 및 과세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파올로 젠틸로니 집행위원이다. 지난 해 EC 집행위원에 취임한 젠틸로니는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한 중량급 정치인이다.

파울로 젠틸로니가 2019년 10월 3일 유럽의회에서 열린 EC 집행위원 청문회에 출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유럽의회)

젠틸로니는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매체 CNBC와 인터뷰에서 “거대 IT기업들은 코로나19 위기의 진정한 승리자들이다”면서 “코로나 위기의 승리자인 거대 IT 기업들이 유럽에서 합당한 세금을 납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번 발언은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미국 거대 IT 기업들을 겨냥한 것이다. 실제로 이 기업들은 코로나19 위기 이후 실적과 주가 모두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OECD 디지털세 협상, 미국의 철수 선언으로 교착 상태  

젠틸로니의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선 ‘디지털 서비스세'를 둘러싼 최근 공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EU)는 구글, 페이스북 등 디지털 기업들이 유럽에서 합당한 세금을 내지 않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다. EU는 2017년 보고서에서 “제조기업들이 평균 23.2%의 평균실효세율을 적용받는 반면, 디지털 기업들은 9.5%만 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EC는 2018년 3월 ‘디지털세(digital tax)’ 도입을 제안했다. 그리곤 디지털세 도입 때까지 임시 조치로 ‘디지털 서비스 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연매출 7억5천만 유로 이상 기업 중 EU 역내 매출이 5천만 유로를 상회하는 기업에 한해 역내 매출액의 3%를 디지털 서비스세로 부과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이 조치는 2018년 12월 EU 경제재정이사회(ECOFIN)에서 합의에 실패하면서 무산됐다. EU 차원의 합의에 실패하자 프랑스, 영국 등이 개별국가 차원에서 디지털 서비스세를 도입했다. 현재 프랑스는 3%, 영국은 2%의 디지털 서비스세를 부과하고 있다.

EU와 별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디지털 세’ 도입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플랫폼 사업자들이 서비스 지역(시장 소재지)에도 적정 수준의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 OECD의 기본 방침이다.

OECD는 2015년부터 ‘다국적기업의 국제조세회피(BEPS)’ 프로젝트를 통해 디지털세 도입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U와 달리 OECD는 온라인 플랫폼, 클라우드 뿐 아니라 컴퓨터, 가전, 휴대폰 사업도 디지털세 과세 대상에 포함시켰다.

OECD는 올해 7월까지 디지털세 핵심 사항에 대한 합의안을 마련한 뒤 올 연말에 최종 방안을 내놓을 계획이었다. 디지털 세 단일한 도입에 실패한 EU도 OECD의 작업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OECD의 디지털세 도입 작업도 난항을 겪고 있다. 미국의 반발 때문이었다. 미국은 지난 6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등 유럽 주요 국가에 보낸 서한을 통해 “국제 디지털 세금 협상 철수” 선언을 했다.

OECD 회원국은 총 37개국이지만 핵심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다. ‘디지털세’ 도입 역시 미국과 유럽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진행됐다. 미국이 협상 중단을 선언하면서 OECD 차원의 단일안 마련 계획은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유럽 국가들은 물리적 사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글로벌 IT 기업들이 제대로 된 세금을 내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애플, 구글 등 주요 IT 기업들은 아일랜드 같은 조세회피국에 유럽 본사를 두는 방식으로 사실상의 탈세 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도 ‘사업이 일어나는 곳에서 과세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그 근간으로 마련된 것이 BEPS 프로젝트다.

미국 생각은 다르다. BEPS는 사실상 미국 IT 기업을 겨냥한 불공정 조약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EU 차원의 합의 실패 이후 독자적으로 디지털 서비스세를 도입한 프랑스 등에 대해 무역보복을 하겠다는 엄포를 하고 있다.

미국이 OECD 차원의 협상에서 전격 철수한 것도 비슷한 생각에서 나온 행위다. 자국 기업에 대한 과도한 과세 정책에는 더 이상 협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젠틸로니 "잘 나가다 미국 대통령 선거 때문에 난항" 비판 

미국의 돌출 행동으로 연말까지 디지털세 부과 기준을 확정하겠다는 OECD의 계획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젠틸로니의 발언이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코로나19로 많은 전통 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진 가운데 ‘나홀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디지털 기업들이 합당한 세금을 내지 않는 건 부당하다고 꼬집고 나선 것.

젠틸로니는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책은 11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행보일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그는 CNBC와 인터뷰에서 “기술적인 부분에선 상당한 진전이 있었는데, (미국) 대통령 선거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젠틸로니가 2017년 이탈리아 총리 재직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담한 뒤 포즈를 취했다.

EU 입장에선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올 연말까지 OECD 차원의 디지털세 협상을 마무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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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적으론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선거가 코 앞에 닥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기존 입장을 번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젠틸로니 집행위원은 미국 거대 IT 기업들이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나홀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여론전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그래야만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지 못하더라도 내년 EU 차원의 독자적인 ‘디지털세 방안’을 마련하는 작업에 힘이 실릴 것이기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