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박경리 '토지'의 역병, 그리고 미국의 화웨이 제재

탐욕과 소통, 연결에 대해

데스크 칼럼입력 :2020/06/17 10:39    수정: 2020/10/05 13:40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조용했던 평사리에 역병이 닥친다. 최참판 댁에 더부살이 하던 조준구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철저한 ‘고립작전’으로 버티기에 들어간다.

목표는 오직 하나. 역병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 최참판 댁 재산을 가로채는 것.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다. 윤씨 부인을 비롯한 최참판 댁 핵심 인물들이 죽어나갔지만, 외부와 인연을 끊은 조준구는 끝내 살아 남았다. 덕분에 꿈에도 그리던 최참판 댁 만석 재산을 손에 넣는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 나오는 얘기다. 작가가 ‘토지’ 최대 악당으로 꼽은 조준구는 그렇게 평사리를 손에 넣었다.

(사진=뉴스1)

■ 봉쇄하다가 모순에 빠진 미국

미국이 화웨이 봉쇄를 일부 해제했다는 얘기를 접하면서 엉뚱하게 ‘토지’의 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다른 듯, 같은 장면이 오버랩됐다.

겉모양은 많이 다르다. 조준구는 스스로 고립을 택했다. 역병이 창궐하는 세상과의 통로를 막았다. 온갖 굴욕을 참으면서 혼자만 살길을 도모한다. 반면 미국은 ‘화웨이’를 왕따시키려 했다. ‘역병의 근원’으로 취급했다.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비슷한 측면이 많다. 고립과 차단을 통해 상대를 무력화하고 재산을 차지하겠다는 것. 조준구는 평사리란 농촌 공동체를 흔들었고, 미국은 ‘글로벌 시스템’에 흠집을 냈다.

문제는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은 화웨이 통제를 통해 오히려 피해를 봤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는 화웨이 봉쇄 때문에 미국 반도체 업계가 70억 달러(약 8조 4천억원) 가량의 사업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ZDNet)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화웨이와 접촉을 금하다보니, 미국 기업들의 행보에 제약이 생겼다. 5G나 자율주행차 같은 표준 작업을 하는 단체에 갈 때마다 일일이 확인증을 받아야 했다. 화웨이가 있으면 아예 가질 못하게 한 때문이다.

반면 상대는 오히려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녔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곳과의 접촉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대로 놔 뒀다간 첨단기술 표준 경쟁에서 중국에 뒤질 상황이었다.

미국의 화웨이 봉쇄는 처음부터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전면 봉쇄를 하기 위해선 동맹국의 협조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미국 내 기업들 역시 그 동안 유지해 오던 관계를 일거에 끊어야 했다. 그만큼 전면봉쇄란 건 위험하다.

■ 평사리의 농촌 공동체 vs 하나로 연결된 글로벌 경제 공동체

이번엔 ‘토지’로 한번 돌아가보자.

조준구는 ‘자발적 봉쇄’를 통해 역병을 이겨낸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갈 때도, 갖은 구박 속에서도, 꿈쩍 않고 버틴다. 덕분에 최참판댁의 자산을 통째로 삼킨다.

그는 평사리의 고립된 섬이었다. 덕분에 목적은 이뤘지만, 인심을 너무 잃었다. 역병이 끝난 뒤 마구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결국 성난 농민들의 습격을 받는다. (물론 그는 살아 남는다. 악인 특유의 생명력으로, 끝까지, 탐욕스럽게 재산을 놓치지 않는다.)

미국은 고립된 섬에 다리를 하나 놨다. 제재를 완전히 푼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소통의 끈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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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 이익을 고려한 조치일 망정, 그나마 다행인 것 같다. 미래를 주도할 차세대 표준 논의는 글로벌 경제의 양대축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제대로 된 표준을 제대로 만들어내기 힘들 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에서 무리한 봉쇄는 자칫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태우는' 패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조준구는 목적이라도 이뤘지만, 인위적 경제 봉쇄는 명분과 실리 모두 놓치고 혼란만 야기할 가능성이 더 크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