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사라지게 만든 불편한 시대

고전의 존재 이유와 가치

데스크 칼럼입력 :2020/06/11 11:02    수정: 2020/10/05 13:41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딸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이었다. 함께 고전읽기를 하기로 했다. ‘이솝우화’를 꺼내 들었다. 나름 교훈적인 내용이 많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다시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내용이 너무나 불건전했기 때문이다. 온갖 꼼수와 술수가 난무했다. 더 예쁜 아이는 죽여야 한다는 내용도 눈에 띄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같이 읽기를 중단했던 경험이 있다.

고전 작품을 읽다보면 이런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모든 작품은 그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더께를 이겨낸 게 고전작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대적 한계까지 뛰어 넘긴 힘들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둘러싸고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워너미디어가 새롭게 선보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HBO맥스가 이 작품을 상영 목록에서 빼버린 때문이다.

미국 영화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인종차별 논란에 휘말렸다.

이유는 단순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흑백 차별과 노예제도를 미화했다는 것이다. ‘노예 12년’으로 유명한 존 리들리가 LA타임스 칼럼을 통해 공개 비판하자 HBO가 곧바로 목록에서 빼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미네소타 주에서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게 계기가 됐다. 이 운동은 지금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제를 미화한 작품을 아무 설명 없이 상영하는 게 옳으냐는 게 리들리의 주장이었다. HBO맥스는 이 주장에 동의한다면서 바로 조치를 취했다. 조만간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재상영하겠다고 약속했다.

■ 그렇다면 '오만과 편견'은? '신데렐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영화사를 빛낸 명작이지만, 노예제를 낭만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백인 폭력단체인 KKK를 미화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지금처럼 인종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선 불편한 작품임엔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영금지나 다름 없는 ‘목록 삭제’ 조치가 바람직한 걸까? 아니면 “이 영화는 19세기 노예제가 있던 미국 사회를 그린 것이니까, 21세기 시청자들은 그 부분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는 주석을 다는 게 올바른 조치일까?

이 물음에 ‘그렇다’는 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인류 역사를 장식한 수 많은 고전 중 ‘주석이나 설명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오만과 편견'

한번 생각해보라.

“상당한 재산을 가진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이다.”

문학사에 길이 남아 있는 명작 ‘오만과 편견'의 첫 구절이다. 이 구절은 작품의 주제를 간결하게 압축한 멋진 첫 문장으로 꼽힌다. 그런데 21세기 사람들이 저 문장을 불편한 감정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남녀 평등에 반하는 관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문장에 ‘저 시대엔 저럴 수밖에 없었어’란 주석을 붙여야 할까? 모든 독자들이 볼 수 있도록?

‘신데렐라’는 또 어떤가? 모든 새 엄마는 ‘나쁜 사람’이란 편견을 심어줄 수 있는데? 역시 저건 그 당시 시대 상황 때문에 탄생한 동화라는 친절한 설명을 붙여야 할까?

■ 과거의 불평등보다 현재의 불평등에 더 관심 가져야

존 리들리가 LA타임스에 칼럼을 게재한 다음 날 내부 편집자인 칼라 홀도 같은 주제로 글을 썼다.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노예제도를 낭만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엔 동의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작품은 '주석을 달 필요 없이’ 당대 최고 배우들이 출연한 할리우드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주석을 달아줄 필요없이’ 현재 그대로 놔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마지막 문장에 깊이 공감했다.

“만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 그게 과거에 남아 있는 과거의 한 부분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맥락적인 분석으로도 해결해주지 못할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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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불편한 건 영화 속 흑백차별이 과거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미국 사회를 아프게 하는 상처로 남아있다. 그래서 더 아프고 불편할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흔적을 없애거나, 설명을 덧붙이는 게 옳을까? 오히려 그 시간에 ‘현재의 불합리한 구조’에 눈을 돌리는 게 더 바람직한 행동 아닐까? 역사에 한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모든 걸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