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IT 버블이 일었다 꺼지며 한차례 흥망성쇠를 겪은 시기, 한국에서도 벤처 붐이 일었지만 10억원 이상 투자받은 벤처 기업은 보기 드물었다. 세계적으로 또다시 창업 열풍이 부는 현재, 이제는 국내에서도 10억원 이상 투자받은 스타트업이 500개를 훌쩍 넘고 100억원 이상 투자받은 스타트업도 134개에 달한다.
이때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가 한 뼘 더 크기 위해선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
역설적이게도 한국 스타트업들의 구원자로 불리는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국내 벤처캐피탈(VC)들이 해외 유망 스타트업에 투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정욱 센터장은 지난 8일 지디넷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를 진단하고, 스타트업들이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 뒷받침 돼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제언했다.
임 센터장은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더 잘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장기적으로 민간 중심의 투자, 즉 국내 벤처캐피탈이 해외 스타트업에 투자가 가능하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의 경우 벤처캐피탈들이 나랏돈으로 구성된 모태펀드에서 출자를 받다보니 국내 기업에만 투자하도록 제한됐다”면서 “스타트업들이 지금보다 더 큰 글로벌 기업이 되기 위해선 투자를 더 많이 받는 게 중요한데, 먼저 국내 벤처캐피탈들의 해외 투자가 가능해져야 해외 비즈니스 연결고리가 생기고 결국 나중에 국내 스타트업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DNA,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이식하다
임정욱 센터장이 처음 스타트업 생태계에 발을 내딛은 계기는 1997년도 조선일보에서 경제과학부 기자로 활동하면서였다. 스타트업이란 말도 없었을 때다. 그때 벤처 창업자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주로 썼다. 이후 2000년부터 약 2년 동안 미국 UC버클리에서 MBA 과정을 밟던 시기, 실리콘밸리가 떴다가 닷컴버블이 붕괴되면서 함께 망하는 걸 봤다. 2008년 경 다음에서 커뮤니케이션 본부장으로 있을 땐 외부 스타트업과 제휴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이렇다 할 국내 스타트업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임 센터장은 "조선일보 기자 시절엔 인터뷰 할 창업가를 찾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며 "2008년 다음 커뮤니케이션 본부장을 맡으며 스타트업들을 만나러 다녔지만, 그때도 10억원 이상 투자받은 것도 매우 크다고 느꼈다"고 회고했다.
2009년부터 3년간 미국 보스턴에 본사를 둔 라이코스 대표로 있을 때는 회사를 흑자전환 시킨 뒤 몸값을 키운 회사를 인도회사에 매각하는 일을 성사시켰다.
2012년 다음 글로벌본부장을 맡던 시기엔 직접 실리콘밸리로 건너가 일했다. 다음이 LP로서 벤처캐피탈들에 투자했고, 이때 임 센터장이 직접 벤처캐피탈 관계자들을 만났다. 실리콘밸리에 입성한 한국계 벤처캐피탈 트랜스링크도 다음이 출자한 대표적인 VC다. 다음에서 직접 투자하는 뉴욕 스타트업에 임 센터장이 이사회 멤버로 있으면서 투자와 경영에 대한 자문을 해줬다. 개인적인 엔젤투자 경험도 있다.
임 센터장은 “우리는 항상 글로벌을 이야기 한다. 실리콘밸리에 있으면서 스타트업을 세계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벤처캐피탈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한국에 가서 벤처캐피탈을 소개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는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사회공헌적 성격의 비영리 단체다.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네이버가 협력해 설립됐다. 임 센터장이 적임자로 지목돼 그해 11월 센터장으로 부임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는 스타트업을 위한 크고 작은 행사들을 개최해 인맥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스타트업 생태계가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현재 스타트업 이익단체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도 2년 전 탄생했다. 현재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최성진 대표와 김봉진 의장(우아한형제들 대표)이 이끌고 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 통계에 따르면 누적 투자금 10억원 이상 유치한 스타트업 수는 5월 기준 500개를 훌쩍 뛰어넘고, 100억원 이상 투자받은 스타트업은 134곳에 달한다.
임 센터장은 "현재에서 더 나아가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좋은 스타트업이 되기 위해선 국내 VC가 글로벌 VC와 겨룰 정도로 성장해야 한다"면서 "대표적으로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는 처음에 글로벌 VC 알토스벤처스의 투자를 받았기 때문에 후속 해외 투자가 가능했는데, 한킴 알토스벤처스 대표가 글로벌 투자자들과 잘 연결된 사람이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해외 투자자들도 비바리퍼블리카에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실제로 투자자들은 자신이 잘 아는 VC나 친구가 있으면 '지금 이 기회에 투자해봐라' 하면서 스타트업에 훨씬 더 쉽게 투자를 권한다"며 "일본도 소프트뱅크 말고는 글로벌 단위로 덩치를 키운 VC는 없는 실정이다"고 덧붙였다.
■ "스타트업이란 남다른 방법으로 세상 문제 푸는 기업"
임 센터장은 스타트업의 뜻을 일반적인 사업과는 달리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 그 문제를 남다른 방법으로 풀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회사로 정의했다. 한국어 명사 ‘사업가’, 영어 단어 ‘entrepreneur(언트로프로니어)’, 또 어원인 프랑스어의 같은 단어 모두 현대적인 스타트업의 의미를 온전히 나타낼 수 없다는 것.
그는 “언트로프로니어는 한국말로는 조금 뜻이 명확하지 않는데, 어쨌든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그런데 나는 스타트업의 정의를 내릴 때 세상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확장성이 있고, 남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푸는 회사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스타트업은 보통의 사업가들 중에서도 일단 고속 성장 하는 회사들을 주로 얘기하는 것 같다”며 “고속 성장을 위해 외부 투자를 받아 성장하다 회사 가치가 커지면 투자금을 투자자들에게 돌려주는 행위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너는 스타트업이고, 너는 아니야’라며 깔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예전에 없던 가치를 만들어내겠다는 도전적인 정신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스타트업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이 회사가 어마어마하게 큰 무언가가 될 거다 하는 막연한 의미도 부여할 필요 없다”고 강조했다.
땅덩이 작은 한국에선 스타트업하기에도 작은 시장일까란 질문에 임 센터장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는 10위 정도고, 인구 5천만에 소득수준 3만불을 돌파한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이다.
임 센터장은 “한국 사람들은 자학적으로 생각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항상 미국이나 중국 같은 데랑 비교하면서 괴로워 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우리나라보다 작은데도 잘 해보고 싶어 하는 오스트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이스라엘 같은 나라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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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는 “ 인구 600만~800만 되는 나라들도 스타트업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나라보다 인구는 많아도 경제력은 떨어지는 동남아 국가들도 한국을 부러워한다”며 “인구 5천만에 소득수준 3만불이란 스펙을 발판삼아 어느정도 힘을 키워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좋은 배경을 가진 나라기도 하다”고 역설했다.
임 센터장은 “그러니 걱정 말고 스타트업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도록 놔두면 경쟁력이 나오게 된다”면서 “스타트업들은 영문으로 된 자료나 기사를 같이 내주는 게 중요하고, 스타트업얼라이언스 같은 기관이나 정부는 해외 투자의 판로를 열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스타트업 행사를 열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