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이념으로 경제를 가두지 마라

[이균성 칼럼] 흑묘백묘가 옳다

데스크 칼럼입력 :2018/05/15 13:44    수정: 2018/11/16 11:21

덩샤오핑(鄧小平)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며 이른바 흑묘백묘(黑猫白猫)를 주창한 게 1979년이다. 혁명 이후 1949년에 ’죽의 장막‘을 친 뒤 가난에 지친 백성의 모습을 30년이나 지켜보고 나서 뼈저리게 내린 결론일 것이다. 흑묘백묘 선언 이후 개혁개방 40년의 성과는 익히 아는 바다. 중국은 미국에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

무상한 세월이 완전히 덧없지만 않은 모양이다. 한반도 북쪽에도 마침내 흑묘백묘 이치가 강렬히 전파된 듯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의 행보는 덩샤오핑의 모습을 빼박았다. 올 들어 파격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김 위원장의 외교 행보는 ‘인민의 행복을 위해 경제난을 타개하려는 의지’를 제외한다면 해석되기 힘들다. 그 파격은 북한 전문가들조차 갈지자 분석을 하게 할 정도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독대 모습

도저히 한 자리에 마주 설 수 없어보였던 트럼프의 얼굴도 환해졌다. 국내 입지가 불안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북해 위기 완전 타결’이 그의 중간 평가에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독선적인 경제 정책으로 세계 각국의 지탄을 받던 그가 세계적 위기를 잘 관리할 줄 아는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을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혁명과 독일 통일에 이은 세계사적 변곡점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거기서 멈출 것 같지 않다. 모든 전문가가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는 와중에 한국 정부보다 먼저 북한에 대한 경제적 투자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이 소식에 청와대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며 맞장구를 쳐준다. 불과 수개월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뭐니 뭐니 해도 먹고 사는 일이 근본이라는데, 흑묘백묘의 이치에, 남북미 3국이 찰떡궁합이 된듯하다.

모처럼 찾아온 절호의 기회이기에 모든 걸 유리그릇처럼 신중히 다뤄야 하겠지만 흑묘백묘의 큰 물줄기가 다시 거꾸로 흐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국내에서도 절대다수가 이를 원하고 있는 듯하다. 남북 평화체제 정립과 뒤이은 교류 협력이 북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가능성이 큰 것처럼 꽉 막힌 국내 경제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믿기 때문일 것이다. 엘도라도까진 아니더라도.

문제는 중국이 바뀌고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이어 북한까지 흑묘백묘의 이치를 받아들이려는 상황에서도 아직까지 낡은 이데올로기에 빠져 이 거대한 물줄기를 막아보려는 생각이다. 무엇을 위하여 그러지는 알 바 아니다. 다만 인류 역사에서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한 소수 정치가 성공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장자는 이미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를 통해 그 무모함을 경계시켰다.

당리에 매몰되고 당략에 휘둘려 천리는커녕 한 치 앞도 못 보는 정치인이야 국민들이 표로 심판하겠지만 늘 생존이 걸린 전쟁터에서 살아야 하는 기업인들은 이 시국을 바라보며 판단이 쉽지 않을 듯하다.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캄보디아 등 옛 공산권 국가에서 결과적으로 적잖은 성과를 낸 게 우리 기업이지만 북한만큼은 아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만하다.

현대 그룹이 대북 경협 사업 때문에 낭패를 봤던 게 사실이고 개성공단 참여 기업들 또한 처참한 상황에 빠졌던 기억과 트라우마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공산권 국가의 독특한 정책과 문화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판에 우리 정부마저 정권 따라 조변석개하니 미래를 예측하기 너무나 불투명했던 게 사실이다. 기회를 확대하고 리스크를 줄이는 게 사업이라 봤을 때 어쩜 고려 대상일 수도 없다.

지금은 은퇴한 삼성 최고 임원 가운데 한 명은 과거 “자본 교통 인력의 자유로운 교환, 즉 3통(通)이 되지 않으면 북한은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삼성이 지금 현대와 다른 상황이 되게 한 여러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혹여 대북 사업을 준비하는 기업이 있다면 지금도 이 말은 되씹어야봐야 할 듯하다. 사업은 분명 열정과 감정 그리고 분위기로 하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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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준비는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비즈니스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기도 하다. 우리 기업이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캄보디아에 앞 다퉈 간 이유도 그것이다. 또 지금의 분위기는 초기 남북경협 시절과 분명히 다르다. 남이나 북이나 평화 기조를 거스르기 힘들 수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한반도 주변 4강도 정치보다는 경제의 관점에서 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00년 전 한반도가 열강의 정치군사 무대로 난도질을 당했다면 이제 경제 무대로 탈바꿈해 세계 중심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