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가 비트토런트(같은 P2P사업자)를 차단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를 이끌고 있는 아짓 파이 위원장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망중립성 원칙 폐기를 골자로 하는 최종안(final draft)을 제출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은 ’인터넷 자유 회복(Restoring Internet Freedom)’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총 210쪽에 이르는 이 문건을 통해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은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ISP)들에게 유선전화사업자에 준하는 강력한 ‘커먼 캐리어’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FCC는 오는 12월14일 아짓 파이가 제안한 문건 수용를 놓고 찬반 표결을 할 예정이다. 5명의 FCC 위원 중 3명이 공화당 출신으로 구성돼 있어 아짓 파이의 제안은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전망이다.
■ FCC "새로운 팩트 없다" vs "스팸 고의로 방치한 뒤 무시"
이번 조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란을 불러올 전망이다. 2년 전 통신법 706조의 타이틀2로 분류했던 유무선 ISP들을 불과 2년 만에 다시 원위치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부작용이 예상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여론 수렴 결과와 상치되는 부분이다.
FCC는 지난 5월 아짓 파이 위원장이 ’인터넷 자유 회복’ 문건을 공개한 이후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쳤다. 문제는 접수된 의견의 절대 다수가 망중립성 원칙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아스테크니카를 비롯한 외신들에 따르면 망중립성과 관련해 FCC에 접수된 의견은 총 2천200만 건이었다. 이 중 98.5%가 ‘망중립성 원칙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FCC가 99%에 가까운 반대의견을 무시한 채 ‘망중립성 폐지’를 강행하는 셈이다.
이 정도로 밀어부치기 위해선 타당한 논리가 필요하다. FCC 측은 미국 현지 기자들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이 부분에 대해 나름의 논리를 펼쳤다.
아스테크니카에 따르면 FCC는 “망중립성 폐지 반대 의견 대부분이 새로운 게 없었다”고 설명했다. 접수된 의견 대다수는 ‘주장’을 담고 있을 뿐 법적으로 고려할만한 팩트가 없다는 게 FCC의 설명이었다.
좀 더 구체적인 수치도 제시됐다. FCC 관계자는 접수된 의견 중 750만 건 가량이 4만5천 개의 동일 인물들이 접수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총 2천200만 건에 이르는 의견 중 절대 다수는 무시해도 될 정도란 게 FCC 주장의 골자인 셈이다. FCC는 한 발 더 나가 접수된 의견은 대중들의 합법적인 의견 표현으로 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고 아스테크니카가 전했다.
FCC 주장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아스테크니카는 이 부분에서 FCC의 행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애초 FCC가 스팸성 주장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 FCC 의견 접수 창고가 ‘쓰레기 같은 의견’들로 가득차도록 방치한 뒤에 오히려 그걸 빌미로 전체 의견을 무시하려하고 있다고 아스테크니카가 비판했다.
물론 FCC가 대중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스테크니카는 아짓 파이가 필요할 땐 대중들의 의견을 앞세웠다가, 불리할 때는 무시하는 등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민주당 출신인 제시카 조엔워슬 FCC 위원은 아짓 파이 위원장의 행보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아스테크니카에 따르면 로젠워슬은 “망중립성 원칙을 폐기하기 전에 미국 전역에서 공청회를 개최하자”고 요구했다.
■ 2년전 통과된 망중립성, 정권 바뀌자 바로 폐기?
망중립성이란 소통의 근간이 되는 통신망은 차별없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망중립성의 양대 원칙은 '단대단(end to end)'과 커먼 캐리어(common carrier)다.
'단대단 원칙'은 망의 양 끝단에 있는 이용자에게 직접 선택권을 준다는 걸 의미한다. 이 원칙엔 이용자를 연결해주는 망은 중립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반면 커먼 캐리어는 연원이 좀 긴 편이다. 멀리 동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을에 있는 유일한 여관, 항만 등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독점 사업자의 횡포를 경계한 원칙인 셈이다.
커먼 캐리어는 미국 서부 개척 초기 철도 사업에도 중요하게 적용됐다. 예를 들어보자. 민간사업자가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를 깔았다고 가정해보자. 화물 운송사업자들이 이 철도를 이용해 수송을 할 때 합당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게 커먼 캐리어 원칙이다. 이 원칙이 유선 전화 시대로 넘어오면서 통신사업자를 규제하는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게 됐다.
미국 FCC는 인터넷이 처음 등장할 때는 사업자들에게 '커먼 캐리어' 의무를 부과하지 않았다. 신규 사업은 규제 보다는 육성을 통해 규모를 키운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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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상대적으로 친인터넷 성향이 강한 민주당 출신 오바마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망중립성 도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결국 오바마 정부는 여러 차례 시행 착오를 겪은 끝에 지난 2015년 유무선 ISP에게 모두 '커먼 캐리어' 의무를 부과하는 강력한 망중립성 원칙을 확립했다. 하지만 이 원칙은 불과 2년 만에 원위치 될 운명에 처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