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 부회장은 왜 하필 지금 사퇴했나

사상 최고 실적 낸 날 "엄중한 상황" 호소

디지털경제입력 :2017/10/13 13:00    수정: 2017/10/13 13:08

올 초 구속된 이재용 부회장을 대신해 그동안 회사를 이끌어 오던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갑작스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리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권 부회장의 사퇴 소식이 알려진 13일 오전은 삼성전자가 사상 최고의 3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한 날이어서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삼성전자는 이날 반도체 부문에서만 매출 20조원, 영업이익 10조원이라는 단군 이래 유례없는 신기원을 열어제쳤다. 반도체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시점에 삼성전자, 아니 '반도체 코리아'의 수장이 돌연 사퇴 선언을 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그만큼 권 부회장의 이날 사퇴는 회사 안팎으로 충격적이다. 이날 오전 삼성전자 태평로 본관은 어수선한 분위기다. 회사 관계자는 "충격적이다. 전혀 알지 못했다"며 "(권 부회장의)정확한 사퇴 배경에 대해 사내에서 공유된 것들이 없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오전에 사내통신망을 통해 알았다"며 "아직은 어수선한 분위기라 뭐라 언급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일부 직원들은 전문 경영인인 권 부회장의 이번 사퇴가 장기적으로 '기술과 고객' 중심 사업인 반도체 사업 부문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근심 어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박수 칠때 떠나는 모습이지만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등 총수 부재는 물론 미래전략실 마저 해체된 상황에서 기술 경영인 출신인 권 부회장의 빈 자리가 자칫 삼성의 일선 사업 부문에서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권 부회장의 용퇴가 오랜 고뇌에 찬 '살신성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올초 서초사옥 다목적홀에서 열린 '제 48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권 부회장은 이날 용퇴의 변에서 "저의 사퇴는 이미 오랜 전부터 고민해 왔던 것이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또 "지금 회사는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서 "다행히 최고의 실적을 내고는 있지만 이는 과거에 이뤄진 결단과 투자의 결실일 뿐, 미래의 흐름을 읽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행간의 뜻을 볼 때 4차 산업혁명 등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는 삼성전자가 이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경쟁에 나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며 자신의 퇴진을 계기로 새로운 도전과 혁신에 나서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무엇보다 지금의 반도체 신화는 과거에 뿌린 씨앗의 열매이며 이에 도취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권 부회장이 최근 업계 행사에서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삼성전자가 인텔을 제치고 (반도체에서) 1위한 것을 축하드린다"고 축하 인사을 건네자 "재수가 좋았다"고 답한 대목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이번 3분기 실적만 봐도 그렇다. 삼성전자가 2분기에 이어 3분기에도 사상 최고 실적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슈퍼 싸이클(장기 호황)을 맞고 있는 반도체(DS) 부문에 대한 쏠림 현상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반면 스마트폰(IM)과 가전(CE), 디스플레이 부문은 시장경쟁 심화에 따라 평년 수준이거나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 3분기 잠정실적을 집계한 결과 매출 62조원, 영업이익 14조5천억원을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이중 반도체 부문에서만 약 10조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제품별 영업이익은 D램 6조원 대, 낸드플래시에서 3조원 대, 시스템LSI가 3천억원 대로 각각 추정된다. 이는 전체 영업이익의 68% 가량이다. 7할을 반도체에만 번 셈이다.

반면 IM 사업부문에서 영업이익 3조2천억원대, CE 부문은 3~4천억원대, 디스플레이 부문은 8~9천억원대 정도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부문은 예년 수준과 비슷하거나 부진한 셈이다.

디스플레이 부문은 지난 2분기 매출 7조7천100원, 영업이익 1조7천100억원이었다. IM사업 부문이 4조원대를 넘지 못했다는 것도 최고 정점은 아니라는 계산이 나온다. 지금의 사상 최고 실적이 자칫 반도체 호황에 따른 착시 현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세계적으로 기업 간 경쟁과 견제가 격화되면서 향후 곳곳에서 사업 전망이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미국 월풀이 국제무역위원회(ITC)에 한국산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청원하는 등 세탁기 부품 수입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메모리 등 반도체 산업이 우리나라의 수출 산업을 이끌고 슈퍼 호황기를 맞고 있는 것도 중국이 아직 산업 전면에 뛰어들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가 크다. 중국 정부가 첨단 부품 및 소재의 국산화율을 크게 끌어 올릴 경우 우리 수출에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3년 넘게 병석에 누워 있는 이건희 회장의 오랜 와병과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인한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장기화,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 부회장 등 그룹 수뇌부들의 사퇴 등 경영 리더십 부재에 따른 도의적인 책임도 권 부회장이 사퇴를 결심한 배경으로 보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에 연루되고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있는 만큼 삼성에게 새로운 경영 쇄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책임감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권 부회장은 이날 반도체사업을 총괄하는 부품부문 사업책임자에서 자진 사퇴하고 삼성전자 이사회 이사, 의장직도 임기가 끝나는 2018년 3월까지 수행하고 연임하지 않기로 했다.

따라서 향후 삼성전자의 최종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와 경영 시스템에도 새로운 변화가 예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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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신망을 받고 있는 새로운 인물이나 글로벌 경영인에 대한 영입도 조심스레 점쳐진다.

권 부회장은 지난 8월 이재용 부회장의 1심 중형 선고와 관련 사내 통신망에 글을 올려 "참단한 심경"이라며 "지금 회사가 처해 있는 대내외 경영환경은 우리가 충격과 당혹감에 빠져 있기에는 너무나 엄혹하다. 비상한 각오로 위기를 극복하자"고 당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