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조사에서 기업 총수들이 해야 할 말

데스크 칼럼입력 :2016/11/25 11:00    수정: 2016/11/28 16:35

삼성그룹은 올해 창립 78주년이다. 창업주 故 이병철 회장이 1938년 대구에 세운 삼성상회가 그룹의 시초다. 삼성상회는 오늘날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삼성물산의 모태이기도 하다. 故 구인회 회장이 설립한 락희화학공업사(LG화학)로 시작한 LG그룹은 올해 69주년이 됐다. 내년 1월이면 고희(古稀)다. SK나 한화는 美군정 이후 그룹의 기초를 닦았다. 현대차그룹은 50년이 채 안 된 49주년이다. 우리나라 대기업 중 가장 오래된 기업은 두산이다. 올해로 딱 120년 됐다. 두산은 올해 국내 대기업 중 처음으로 4세 경영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우리 대기업은 수백 년 동안 기업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서구 기업들과 비교해 보면 그 역사가 길지 않다. 유럽에는 1, 2차 대전을 겪으면서도 100년, 200년 된 기업들이 수두룩하다. 약국으로 시작해 글로벌 의약화학 기술 기업으로 성장한 독일 머크 그룹의 기업史는 무려 348년에 이른다. 오너 경영과 현대식 기업 경영의 장점을 조화롭게 접목한 독특한 지배구조가 머크 가문이 12대째 내려온 비결이다. 한국의 대기업은 자본의 축적과 숙성 과정도 길지 않다. 대부분 해방 전후 상인 자본으로 싹을 틔워 산업 자본으로 압축 성장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도약에 이바지했지만 산업화 시절 국가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혜택을 입었다. 국민한테 진 빚이 적지않다.

정치인들은 늘 이런 약한 고리를 노렸다. 빚진 만큼 돈을 내라는 것이다. 명분은 거룩하고 그럴 듯 했다. 그러나 그 돈은 대부분 역대 권력자들의 사욕이나 퇴임 후 치적 쌓기에 쓰였다.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새 정부는 정경유착 뿌리를 뽑겠다고 떠들어 왔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듣는 기업은 별로 없었다. 선거 때나 퇴임 때마다 정치권은 재계에 손을 벌렸고 몸을 사린 기업들은 이런 저런 명목으로 헌납(?)을 해왔다.

1992년 YS에 맞서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는 "권력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통령)출마했다"고 했다. 고인은 앞서 1988년 '일해재단 비리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가 일해재단에 거액을 낸 경위에 대해 '강제성이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현대그룹은 문민정권이라는 정치적 자본을 앞세운 YS 정권 하에서 '건방진 장사치'라는 수모를 당하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20년 전 베이징 발언을 통해 "한국 기업은 이류, 관료는 삼류, 정치는 사류"라고 일갈했다. 이 회장은 지금 2년 째 와병 중이다. 대기업 선대 회장들은 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할 말은 하는 강단이 있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국민에게 진 빚을 갚고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정권의 협박과 강압에 호락호락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시대가 변했지만 대기업도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기도 하다. 입으로는 글로벌 일류 기업을 지향하면서 자식에게 기업을 대물림하는 한국식 경영시스템으로 국민들에게 큰 경제적 부담을 안겨 왔기 때문이다. 작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승인을 위한 임시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들은 이렇게 호소했다. "이 합병비율(1대0.35)로 주식을 넘겨야 한다는 사실은 가슴 아프지만 외국계 자본인 엘리엇에 이득이 갈까 우려돼 합병에 찬성한다"고. 어떤 이는 "합병하면 기부도 많이 하고 주주를 위한 정책도 많이 펼치길 바란다"고 했다. 삼성이 부모의 심정 같은 주주들의 마음을 조금 더 일찍 헤아렸다면 '최순실 게이트' 정국 속에서 지금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으로 길을 잃은 대한민국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한번 묻고 싶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권력을 사유화한 무리와 엘리트 추종자, 그리고 그 권력의 눈치를 보며 뭉칫돈을 건넨 대기업 중 누구를 징벌해야 하나. 권력의 무리일까, 아니면 대기업일까. 아마도 어느 한쪽만은 아닐 거다. 국정을 농단한 무리에게는 사욕에 눈이 멀어 국가 권력을 남용한 원죄가 있고 대기업에게는 국민과 주주를 위해 투명 경영을 하지 못하고 대통령에게 '노(NO)'라고 말하지 못한 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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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사에서 정치와 기업의 잘못된 주종 관계는 청산해야 할 낡은 관행이다. 기업은 정권의 특혜를 바라고, 권력은 기업으로부터 뒷돈을 받는 부당거래는 국민 경제를 좀 먹는 암적인 존재라는 건 해방 이후 수십년간 자본주의를 운영하면서 우리가 깨달은 엄연한 사실이다. 21세기 글로벌 디지털 혁명 시대에 누가 누구를 밀어주고, 끌어준다는 말인가.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한 후 미르-K스포츠 재단에 기금을 출연한 대기업 총수 9명이 내달 5일로 예정된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됐다. 가서 당당히 말하라. 기업에게 있어 국민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은 격변하는 글로벌 경쟁 시대에 지속 가능한 변화와 성장이라고.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과 투명한 내부 이사회를 만들어 사업보국에 더욱 힘쓰겠노라고. 그러니 더 이상 기업을 괴롭히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