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권이 상실된 본인의 게시물을 타인이 검색할 수 없도록 조치하는 '잊혀질 권리 가이드라인'이 이르면 이달부터 시행되지만 인터넷 업계는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시행 가능하느냐'는 질문에 업계는 공식적으로 ‘침묵’ 혹은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정부를 의식한 것이고 속마음은 해봐야 실효성이 없다는 쪽으로 해석된다.
■가이드라인 4월 시행 가능?…포털 社 ‘침묵’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달 25일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 요청권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네이버, 다음, 구글 등 검색 서비스 사업자들과 게시판 관리자들은 이용자가 본인 글에 대한 접근배제 요청을 해오면 정해진 기준에 따라 해당 게시물을 검색 목록에서 배제하거나 블라인드 처리해줘야 한다.
하지만 네이버, 다음, 구글, 네이트 등 대표 검색 포털 사업자들은 이번 가이드라인의 시행 가능 여부에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속내를 들어보면 결국 안 하거나, 못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역시 실효성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한 포털사 관계자는 “회원 정보가 삭제된 이용자가 본인 글을 지워달라고 요구할 경우 그 사람이 게시물의 주인인지 명확히 입증할 기술적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한국에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한국에 사무실이 없는 경우 게시물의 접근배제가 불가능해 역차별 논란이 가중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방통위는 해당 가이드라인 시행을 서둘러 이 달 중에는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사용자 관점에서 봤을 때 본인 글 삭제 정도는 최소한 포털사들이 보장해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방통위 박노익 이용정책국장은 “기존에 이미 실무진들 사이에서 협의를 한 사안이고, 이 정도(본인 글 검색 차단)는 국민들의 게시글을 갖고 사업을 하는 사업자들의 사회적인 책무에 해당된다”며 “사업자들은 본인 확인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해당 게시물을 보고 일반적, 합리적, 상식적인 수준에서 본인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잊혀질 권리☞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 요청권
이번 방통위가 발표한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 요청권 가이드라인’은 유럽에서 촉발된 잊혀질 권리의 내용과 많이 다르다.
유럽의 잊혀질 권리는 ‘타인’의 글을 검색에서 차단해 달라는 내용이고, 방통위의 가이드라인은 본인이 삭제하기 힘들어진 ‘내’ 글을 가려달라는 것이 핵심이다.
잊혀질 권리는 2014년 유럽사법재판소가 검색 서비스 기업인 구글에 대해 검색결과를 삭제하라는 판결을 내린 이후 글로벌 이슈화 됐다. 스페인 변호사 코스테야 곤잘레스가 자신에게 불리한 과거 정보를 삭제하라고 구글에 요청했고, 이를 유럽사법재판소가 받아들인 사건이다. 판결 뒤 구글에는 자신과 관련된 내용을 지워 달라는 요청이 10개월간 21만여 건이나 쏟아졌다.
이처럼 잊혀질 권리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자 방통위 역시 예산을 들여 지난 2014년 9월부터 관련 전문가 9인으로 구성된 ‘잊힐 권리 연구반’을 운영해 왔다. 당시 방통위는 표현의자유-알권리와의 조화, 기술적 경제적 한계 등에 대한 분석과 전문가 의견수렴을 통해 잊혀질 권리 법제화 방안 검토 계획을 언급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제3자가 작성 게시한 권리 침해 글 등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삭제(임시조치), 반박내용 게재 요청이 가능하다.
이용자 본인이 작성, 게시한 저작물이 제3자에 의해 전달, 복사, 인용, 발췌된 경우는 저작권법 상의 복제, 전송 중단 요청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 언론기사에 대한 분쟁 발생 시에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정정, 반론, 추후 보도청구가 가능하다.
즉 유럽과 달리 한국은 이미 유럽에서 사용되는 잊혀질 권리와 유사한 권리가 보장되고 있다는 뜻이다. 관련해서 굳이 새로운 법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많다.
인터넷 진보 기관인 오픈넷은 “정보의 시의성은 정보주체의 주관적 상황에 따라 판단할 수 없다”면서 “우리가 잊혀질 권리에서 건질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과거의 과오 때문에 불합리하게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의 로레나 야우메 팔라시 박사는 “법으로 제정해서 윤리적인 부분을 제재할 것이 아니라 이는 사회에 맡겨야 한다”면서 “민주주의가 잘 안 지켜지는 국가일수록 나라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데 정보를 은폐하기 위해 잊혀질 권리를 악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잊혀질 권리가 사용자 권한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칫 사람들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방통위는 현행법으로 처리 가능하거나, 가치충돌로 논란이 되는 내용을 가이드라인에서 제외 시키기로 했다. 논란의 핵심이 된 내용은 잘려 나가고 본인이 지우기 힘든 게시물 또는 사망한 사람의 게시물을 대리인이 지울 수 있는 ‘자기 게시물 접근배제 요청’ 가이드라인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문제는 이런저런 논란과 이슈로 ‘법제화’ 계획이 ‘가이드라인 마련’으로 축소되고, 검색 배제 범위도 ‘타인의 글’에서 ‘내 글 또는 망자의 글’로 한정되다 보니 누구에게 딱히 득될 것 없는 ‘울타리’만 생긴 꼴이 됐다는 지적이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최성진 사무국장은 “그 동안 의견수렴 과정을 많이 거치긴 했지만 가이드라인이 초기 때와는 모양이나 내용이 달라졌다”면서 “아무 문제 없이 적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라고 볼 수 없다. 실효성 측면에서 필요한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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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전에는 없던 문제들이 가이드라인을 통해 발생될 우려가 있다”며 “이번 가이드라인은 잊혀질 권리와 관련도 없고, 신청도 별로 없겠지만 신청이 들어와도 삭제해줄 수 있는 경우도 거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노익 국장은 “이번 가이드라인은 (당초 계획에서) 상당히 많이 후퇴했다. 내용이나 범위가 필요 최소한이다”면서 “본인이 작성한 게시물을 지워주라는 것인 만큼, (사업자나 대중들도)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