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SW) 중심으로 돌아가는 네트워크 시장 흐름을 대세로 인정한 결과일까? 시스코시스템즈가 차세대 데이터센터 네트워크 환경에 자사 라우터와 스위치로 점철된 아키텍처를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일부 하드웨어(HW) 구성에 범용 x86 서버 플랫폼을 쓸 수 있게 했다. 자사 라우터와 스위치용 SW를 업그레이드해, 그 확장된 네트워크 및 데이터센터 관리 기능을 돌리기 위한 그림에 x86 서버를 끼워넣었다.
이미 데이터센터에 자리잡은 자사 라우터와 스위치 기반 네트워크 구성을 갈아 엎는 수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간 독자 HW 중심의 차세대 기술 발전에 주력해 온 시스코가 그 방향을 살짝 조정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범용 HW 기반 데이터센터 인프라 기술을 만드는 페이스북 오픈컴퓨트프로젝트(OCP)나, SW 중심의 네트워크가상화 전략을 미는 VM웨어, 마이크로소프트(MS)의 움직임을 의식한 결과로 비친다.
지난 몇년간 글로벌 IT기업과 화이트박스 서버, 네트워크 장비 제조사들이 OCP에 활발히 참여해 대형 인터넷 사업자와 각국 통신사들에게 더 저렴하고 효율적인 데이터센터 구축 기술을 제공할 것이란 기대를 심으면서, 시스코같은 회사의 HW 매출을 위협 중이다. 또 VM웨어와 MS는 각각 제조사 HW에 구애되지 않는 네트워크가상화 기술 기반의 SDN 전략으로 시스코같은 회사와 대립각을 세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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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운데 시스코코리아는 지난 30일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서 '디지털네트워크아키텍처(DNA)'를 소개했다. DNA는 디지털화를 떠받칠 네트워크 인프라 혁신과 통합 운영의 중추 기술로 묘사됐다. SW정의네트워킹(SDN), 네트워크기능가상화(NFV), 무선랜 자동화관리, 3가지를 실현하는 아키텍처였다. 기업 환경에서 그 혜택을 보기 위해, 오로지 시스코 네트워크 장비만으로 구성할 필요는 없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네트워크의 'DNA'를 바꾸겠다"…정체성 변화 예고?
일례로 DNA는 프로그래머빌리티와 컨트롤러 기반 자동화, 쉽게 말해 간편한 SDN 구성을 지원하는데, 그걸 위한 'APIC-EM'이라는 SW는 시스코 라우터나 스위치가 아니라 일반 x86에 설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기업내 데이터센터에 이미 구축된 시스코의 라우터, 스위치, 무선랜 네트워크 구성, 제어, 관리 자동화를 돕는다. 일종의 컨트롤러다. 관리자가 인프라 상황에 맞게 자원 배분 정책을 짜고, 그에 따른 기능 설정이나 구성을 유연하게 재조정하게끔 작동한다.
시스코가 제안하는 APIC-EM 활용처는 원격 사무실, 브랜치 오피스 등이다. 즉 핵심업무 인프라가 아니라서 물리적으로 담당 인력을 배치하기엔 부담스럽지만, 관리를 중앙화하면 업무를 더 효율화할 수 있는 영역에 요긴하다. 본사가 시범 제공 중인 APIC-EM은 일단 무료다. 국내 시범 공급 시기는 오는 5월로 예상된다. 시스코는 향후 자체 부가기능 및 외부 파트너의 부가기능도 제공할 계획이다. 이미 데이터센터에 시스코 장비를 제법 들여 놓은 기업들이라면 이걸 '놀고 있는' 서버에 한 번 깔아 볼만 하다.
이것만 가지고 시스코의 HW 종속성이 완화됐다고 단정하긴 섣부른 감이 있다. 그런데 함께 소개된 '엔터프라이즈NFV'라는 SW도 x86 서버 환경에서 쓸 수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엔터프라이즈NFV는 시스코가 만든 라우터, 방화벽, WAN최적화, 무선랜컨트롤러 등 가상네트워크기능(vNF)을 돌린다. vNF를 돌리기 위해 필요한 가상화 계층, API, 시스템 및 네트워크 자원 등을 제공하는 플랫폼 관리, 작동상태 모니터링 시스템을 포함한다. 가상화 계층은 KVM 하이퍼바이저와 가상스위치로 구성돼 있다. 덕분에 vNF를 시스코 라우터, x86 플랫폼(UCS서버), 다른 제조사의 x86 서버(브랜드 및 화이트박스 장비) 등 어디서든 구동할 수 있다는 게 회사측 설명이다.
■아직은 "시스코OS=머리, x86서버·SW=손발"
시스코가 DNA라는 차세대 아키텍처를 소개하고 그 핵심요소 2가지를 x86 서버 환경에서 쓸 수 있게 했다는 점은 신선하다. 그러나 이게 x86 서버만으로 시스코의 APIC-EM을 통해 네트워크 자동화 기술을, 엔터프라이즈NFV를 통해 가상화 기술을 쓸 수 있다는 얘긴 아니다.
네트워크관리자가 데이터센터에서 APIC-EM이나 엔터프라이즈NFV를 쓰기 위한 조건은 단지 x86 서버에서 SW를 받아 깔거나 그 기능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결국은 이런 SW를 돌리는 x86 서버가 시스코 네트워크 HW가 맞물려 돌아가도록 구성돼야 한다. 거기 탑재되는 네트워크 운영체제(OS)가 핵심이다. 즉 x86 서버상의 SW들은 그 손발 내지 몸뚱이일 뿐, 머리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실제로 APIC-EM의 경우 시스코 카탈리스트 시리즈(스위치), 넥서스 시리즈(스위치), 무선랜컨트롤러, ISR 라우터, ASR 시리즈(라우터), CSR 시리즈(라우터) 등 모델과 일정 버전 이상의 IOS 또는 IOS XE 버전을 요구한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NFV 역시 DNA의 사상을 반영한, 최신 IOS XE에 포함된 것이다. 이 최신 IOS XE를 적용 가능한 장비는 현재 카탈리스트3850/3650, ASR1000, ISR4000 시리즈로 제한된다. 이를 통해 엔터프라이즈NFV를 운영할 수 있게 될 HW는 일부 UCS서버와 ISR4000 라우터 정도다. 시스코가 향후 지원 대상 확대를 예고했지만 아직 아무 x86 서버에서나 직접 구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얘기다.
진강훈 시스코코리아 커머셜&파트너 사업본부 SE팀 상무는 APIC-EM의 역할에 대해 "서비스제공사(SP)의 트렌드였던 SDN을 엔터프라이즈 환경으로 가져오는 것"이라며 "데이터센터 자동화의 중심에 시스코 SDN 아키텍처인 애플리케이션중심인프라(ACI)가 있고, 그 주변부를 DNA로 보완하는 그림이라 보면 된다"고 표현했다.
■변화의 시작?
시스코가 DNA를 통해 추구하는 변화의 정도를 어떻게 가늠해야 할까. 한가지 힌트는 DNA가 기존 시스코 SW제품군 '오픈네트워크환경(ONE)'의 일부로 공급된다는 점이다. 물론 ONE도 말이 SW제품군이지, 아직 시스코 HW에 종속적이다. 시스코의 고성능 라우터와 스위치 장비 사용을 전제한다. 애초에 ONE의 일부로 제공될 DNA가 시스코 HW 사용을 수반한다는 건 필연적인 사실이다.
그럼에도 네트워크 인프라에서 자사 네트워크 장비로 구축된 영역을 '진화의 최전선'으로 삼았던 시스코가 그 경계를 스스로 넘어섰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시스코는 DNA 구성을 위해 100% 시스코 장비를 쓰는 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DNA를 시작으로 차세대 네트워크 아키텍처 구성에 x86 서버같은 범용 HW 자원의 역할을 점차 늘려 나갈 수도 있다.
회사측이 DNA를 "간소화된 SW기반 라이선싱으로 (기업들에게) 투자 보호와 유연성을 제공한다"고 첨언한만큼, SW 사업 성격을 강화하려는 의지도 읽힌다. 라우터와 스위치 장비를 더 파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인 모습이다. 아직 전체 제품 매출 가운데 과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은 네트워크 HW 부문을 갑자기 버릴 수 없기에, 충격의 부담을 줄이는 움직임이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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