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대규 휴맥스 회장은 한국 벤처업계의 산증인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한국 벤처산업의 역사와도 같다. 17일 분당 사옥 집무실에서 만난 변 회장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 있었다. 스물아홉에 창업했고 그 사이 강산이 세 번 가까이 변했으니 그럴 만 하다. 백발은 멋진 훈장처럼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 색깔이 하얘지는 것과 같은 속도로 휴맥스는 지속 성장해왔고 이제 매출 조(兆) 단위 기업이 됐다.
업계의 많은 사람이 휴맥스를 모범적인 벤처기업으로 꼽고 변 회장을 벤처기업인의 맨 앞자리에 세우는 까닭은 두 가지 때문으로 보인다. 철저하게 글로벌에서 성장했고 큰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커왔다는 점이 그것이다. 동시대에 창업한 다른 벤처기업과 달리 지속성과 확장성을 획득한 것이다. 나는 그 대부분의 성과가 변 회장 특유의 ‘고독한 절제’와 ‘치열한 학습’ 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휴맥스의 한 고위 임원은 변 회장에 대해 “A부터 Z까지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제품과 시장에 대해 직접 개입해 모든 걸 관장한다는 스티브 잡스가 떠올랐다. 벤처기업이되, 사업을 할 때 ‘근거가 빈약한 모험’보다 ‘명백한 비주얼(가시화)’을 훨씬 더 중시한 셈이다. 모험을 하되 허튼 모험은 철저히 배제하려 했고, 그렇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 ‘치열한 학습과 고독한 절제’인 셈.
변 회장은 국내 산업계의 현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벤처기업의 역사를 3세대로 정리했다. 1세대는 제조 기반의 벤처기업인들이고, 2세대는 인터넷 기반이며, 3세대는 모바일이다. 대충 10년 주기로 이 세대가 바뀌었다. 변 회장의 ‘벤처 3세대론’ 가운데 내 눈길을 끈 것은 벤처와 대기업(즉 전통기업)의 승부다. 이 승부의 결과가 산업구조 혁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조업에 뛰어든 1세대는 결과적으로 대기업에 졌다. PC, 삐삐, 셋톱박스, PDA, 의료기기, 휴대폰 등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혁신 제품들을 내놓는 기업이 숱하게 등장했지만 대기업 중심의 판도를 바꾼 기업은 없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기업도 별로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문제는 그 결과 전자 제조 산업의 생태계도 취약해졌다는 점이다. 중국에 주도권을 내주는 속도가 가파른 이유다.
인터넷 중심의 2세대는 벤처가 대기업을 이겼다. 포털과 온라인 게임이 대표적이다. 인터넷이 시대 흐름이고 산업 패러다임의 커다란 변화인 만큼 두 분야에 여러 대기업이 다양한 진출을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대기업이 좋은 벤처기업을 인수해 망친 사례도 여럿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대기업의 경우 사업 의욕과 막대한 자본은 있지만 업(業)의 본질을 벤처보다 모르기 때문이다.
모바일 중심의 3세대는 현재 전쟁 중이다. 변 회장은 그러나 벤처의 승리를 점쳤다. 인터넷 시대의 승패를 결정한 게 ‘업(業)의 본질에 대한 이해도의 차이’였듯 모바일 시대 승부를 가를 관건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의 의사 결정자들에게는 모바일이 ‘공부해서 이해해야 하는 도구’일 뿐이지만 젊은 벤처 창업자들에게 그건 ‘몸의 연장(延長)’이다. 두뇌는 물론이고 근육과 감각이 태생적으로 다른 것이다.
성공한 벤처가 많이 나와야 산업 구조가 혁신되고 나라 경쟁력이 높아진다. 미국이 대표적인 예다. 아쉬운 건 정부 정책이다. IT 기술이 주도하는 산업의 흐름은 그야말로 광속으로 변한다. 구조적으로 정책이 시장을 앞설 수 없다. 정책이 시장보다 늘 5~10년 늦다. 정책이 결정될 때는 이미 시장에서 승부가 끝난 뒤다. 글로벌 트렌드를 몸으로 이해하는 젊은 관료와 정치인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변 회장이 재작년에 9년 젊은 후배(김태훈 대표)에게 휴맥스 CEO 자리를 물려주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것도 같은 맥락인 듯하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나라든 새로운 감각의 촉수를 부단히 단련하지 않는다면 금세 낡고 쓸 모 없어진다는 사실을 잘 아는 것이다. 기업 조직도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것이다. 오랜 관록의 노하우가 필요한 역할과 새로운 감각이 요구되는 일을 가늠할 줄 아는 것이겠다.
모바일 시대, 변 회장의 승부처는 여전히 글로벌이다. 문제는 아이템이다. 주력 분야인 셋톱박스 하드웨어 시장이 충분히 성숙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의 방향은 하드웨어의 쓸 모를 극대화할 SW, 콘텐츠, 서비스, 플랫폼이다. 그리고 그걸 구현해줄 신기술들. 하드웨어로 글로벌 기업이 된 변 회장은 이제 SW, 콘텐츠, 서비스, 플랫폼으로 전향해야 할 때가 됐고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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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회장의 고민처럼 모바일이 주도하는 글로벌 IT 시장에서 한국의 비(非)제조 분야 벤처기업이 뻗어나갈 공간을 마련한다면 답답한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는 데 적잖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네이버의 라인은 그런 꿈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그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벤처기업은 각 영역에서 그럴만한 아이템을 찾고 정부는 그런 감각을 획득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글로벌 트렌드와 기업 환경에 맞게 정부도 젊어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