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한빛미디어에서 마련한 독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시작된 일정은 마이크로소프트 테크데이즈 행사, 정보통신산업진흥원 뉴욕연수생들과의 재회, 자바 개발자와의 만남, 숙명여대 강연으로 이어지면서 숨차게 진행되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웠는데, 직접 만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내용이 많았다.
한국에 있는 개발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랄까, 그런 부분에 대한 깨달음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모르고 있었던 한국 개발자들의 현실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된 것이 소득이었다.
한국의 개발자가 힘들고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예를 들어서 마이크로소프트 테크데이즈 행사 때 백스테이지나 홀에서 만난 여러 개발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느끼기로는 (그들이 관심을 갖는 부분, 기술적인 수준 등이) 미국에서 만나는 개발자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리액티브(Reactive) 프로그래밍과 같은 최근 기술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함수 패러다임에 대해서 조예가 깊은 사람도 있었고, 기계학습이나 사물인터넷 등을 논의하는 사람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배웠다. 백스테이지에서 만나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마이크로소프트 MVP 김호광씨 같은 사람은 프로그래밍을 통해서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뜻 깊은 활동을 하고 있어서 나를 감동시켰다.
그렇다면 내가 들었던 개발자들의 고담시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개발자들이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지내고 있다던데, 그것은 과장된 소문이었을까? 아니, 고담시티에 사는 개발자들은 이렇게 멋진 컨퍼런스에 참석할 여유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컨퍼런스 이후에 만난 다른 여러 개발자들과의 대화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개발자 세계는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삼성, LG와 같은 대기업, 다음카카오, 쿠팡과 같은 잘 나가는 벤처기업 등 소수의 회사가 메이저리그를 형성한다. 개발자들의 수준도 높고, 연봉도 괜찮고, 하는 일도 재밌다. 이러한 회사들은 속속 판교로 모여들고 있다고 한다.
훨씬 많은 나머지 개발자들은 모두 마이너리그 소속이다. 프로그래밍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고 학원에서 속성으로 배운 사람들이 다수이고, 박봉이고, 업무량은 살인적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사티야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가 말한 멀티 플랫폼 지원전략이나, 내가 이야기한 폴리글랏 프로그래밍이 달에서 토끼가 절구를 찧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개인 탓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자체가 내일에 대한 고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이너리그에 노임단가표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번 방문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SI 업계의 하청구조가 건설업계의 모델을 그대로 가져왔다더니, 개발자들의 임금을 정하는 것조차 건설업계의 모델을 답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정부가 개발자를 경험의 ‘햇수’에 따라서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누고, 각각에 대해서 (그 자체로 박봉인) 평균급여를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이면 정말로 프로그래밍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삽질을 할 사람을 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을 갖는다는 것은 더 많은 야근과 밤샘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에 아무도 프로그래밍의 진정한 기쁨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짠 코드를 복사해서 붙여놓고, 얼추 돌아가는 것 같으면 작업을 종료한다. 어차피 야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낮에 집중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최대한 일을 적게 하면서 많이 한 것처럼 보일 것인가를 고민한다. 프로젝트 관리자나 고객이 지나치게 황당한 요구를 하면 회사를 옮겨보기도 하지만 거기서 거기다. 하루가 다르게 몸은 망가지고, 머리는 백지장처럼 하얘진다.
그나마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마이너리그를 떠나서 프리랜서가 되고, 운이 좋으면 메이저리그에 입성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수다. 마이너리그에서 몸이 망가진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 치킨집 사장이 되고, 빈자리는 컴퓨터 학원을 1~2개월 다닌 ‘초급’ 개발자로 채워진다. 그 사람의 프로그래밍 실력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머리수를 채워서 단가를 받아내면 그걸로 좋다.
이런 식의 구분이 존재하는 한, 잘 나가는 메이저리그의 장기적인 전망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 프로그래밍은 기술적 측면 못지않게 문화적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상호작용의 결실이다. 풍성한 하위문화가 넘쳐흐르지 않으면 엘리트문화도 꽃을 피우지 못한다. 판교에 입성한 개발자들의 문화를 뒷받침하는 개발자 일반의 문화가 존재하지 않으면 판교의 엘리트 개발자들도 오래가지 못해서 질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구분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SI 업계의 하청구조를 대폭 개선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국에 있는 개발자 협회 같은 곳에서 국회와 더불어 입법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노임단가표 같은 황당한 가이드라인도 당장 철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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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실력을 ‘햇수’를 기준으로 획일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프로그래밍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할 수도 있어야 한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하면서 더 많은 보상을 받고, 열정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그에 맞는 수준의 일을 하면서 자기가 기여한 수준에 맞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 모두 똑같이 박봉을 받으라하면 동기부여가 없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모든 개발자가 동일한 리그 안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여야 한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사이에 존재하는 노골적인 경계선을 철폐하는 것은 IT 강국 코리아라는 말이 되살아나기 위한 필수적인 선결과제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