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냉전시대 미국의 고민...정확한 군함· 비행기 위치좌표는?
1950년대. 2차대전 후 미국의 초국가적 과제는 소련 핵무기에 대한 억지력 확보였다. 미국의 3대 핵전력 축은 잠수함발사유도미사일(Submarine-Launched Ballistic Missiles · SLBMs), 전략폭격기 투하용 핵폭탄, 대륙간탄도탄(ICBM) 등으로 구성됐다.
1953년 소련의 수폭실험 성공은 미소의 긴장을 사상 최고조로 올려놓았다. 이 때 미해군은 잠수함용 폴라리스 핵미사일 프로그램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부정확한 좌표가 정밀한 공격의 또다른 장애물이었다.
‘어떻게 하면 잠수함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을까?’
미해군연구소(NRL) 최대 고민거리이자 관심사 중 하나는 해군함정과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미사일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당시 최고 수준의 위치측정방식에 따른 좌표라고 해봤자 1km에서 수백m까지 오차를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잠수함의 경우 하루에도 몇번씩 좌표를 확인하기 위해 수중으로 올라와야만 했다. 이들 연구의 초점은 이른바 빔라이더(Beam LIDAR) 방식으로 처리되는 전파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미사일 발사에 앞서 적항공기 등 목표물에 전파를 발사하면 미사일이 이 유도전파를 따라가서 명중시키도록 돼 있었다.
군 전투함들에겐 저고도로 공격해 오는 적항공기에 대응할 정확한 미사일용 전파신호 개발이 긴요했다. 미사일을 쏘아봤자 위치가 정확치 않아 명중률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급하기는 폴라리스 핵미사일(SLBM)을 쏘는 잠수함역시 마찬가지였다. 핵 잠수함은 미사일 발사를 위해 수면으로 떠올라야만 했다. 이는 적에게 잠수함의 위치를 노출시켜 주었기에 매우 위험했다.
해군은 폴라리스 프로그램 시작 4년 만인 1960년 최초의 미사일잠수함 USS조지워싱턴호를 통해 폴라리스 미사일을 수중발사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듬 해부터 폴라리스가 배치됐다. 잠수함은 수중발사능력을 갖추었지만 수중에서 스스로의 정확한 좌표를 알아 낼 기술은 갖추지 못했다.
그동안 해군은 잠수함과 선박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시켜 줄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항법기술을 개발해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정확한 데다가 특정지역에 편중되거나 지구환경 등에 영향을 받는 등 큰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냉전시대에 핵을 가진 소련의 존재와 그에 따른 핵위협은 미국으로 하여금 어떤 대책, 얼마 만한 비용이 들더라도 무릅쓸 의향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어떤 항법방식도 막대한 비용을 들일 만한 당위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미해군과 공군은 각각 자체연구소 기술인력을 활용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미군 핵전력의 3분의2를 차지하고 있는 공군역시 더 정확하고 믿을 만한 항법시스템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공군은 이동식 ICBM발사대 제작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해군은 보다 정확한 항법기술의 확보노력에 특히 적극적이었다.
미국 잠수함이 SLBM발사에 앞서 보다 정확한 좌표를 확정하는 것은 전력을 배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투함,잠수함,ICBM,비행기의 정확한 위치와 시간을 결정하는 기술을 확보해 소련 핵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하려는 국방부의 노력은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57년 7월23일 아이젠하워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어 우주에 위성을 쏘아 올리겠다는 발표를 했다.
“미국은 국제지구과학자들이 모여서 만든 지구관측년(IGY 1957. 7. 1~1958. 12. 31)참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농구공만한 소형 인공위성을 발사할 계획입니다.”
이어 미해군연구소(NRL)에는 레이더간섭계를 이용하는 위성위치추적 시스템 가동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해군은 전투함이나 잠수함은 물론 위성의 좌표까지 아우르는 위치추적시스템 개발의 또다른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해군은 1949년 5월3일 바이킹 1호발사를 시작으로 55년 2월4일까지 모두 12기의 로켓을 발사했다. 바이킹프로그램은 이미 관측용 로켓을 우주로 올리는 데 성공, 지구를 촬영하는 등 충분한 성과를 얻어내고 있었다.
2년 전 국방부가 세운 합동 인공위성 발사계획 오빗(Orbit)은 군사용이란 이유 때문에 부결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미해군연구소(NRL)은 해군천문대를 위한 시계와 시간결정시스템 개발에 연구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모든 무선스펙트럼을 이용해 새 무선항법 및 시간 전파시스템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전파의 성질도 파악했다. 낮은 무선주파수는 장거리에서 이온층에 의해 약해졌고 고주파수는 장애물에 부딪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항법 방식은 간섭계(Interferometer),비콘(Beacon) 등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주 전파기지국의 수신 및 전파 전송 , 그리고 보조기지국을 이용한 전파재생을 통해 거리를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3각 측량방식과 비슷했다. 미해군은 이런 과정을 통해 미니트랙(Minitrack)이라는 지상 기지국 기반의 위성위치추적시스템을 탄생시켰다. 아직 뱅가드위성발사 이전이었다.
1957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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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다양한 방식으로 지구상에서 정확한 위치좌표를 알기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소련이 먼저 인류최초의 지구관측용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쏘아올렸고 세계는 경악했다.
이 위성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미국 연구원들은 세계최초의 위치측정 위성에 대한 결정적 실마리를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