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잘못 끼운 첫 단추
KAL007 조종은 한국의 대통령전용기 운항을 책임지던 천기영 기장이 맡고 있었다. 그는 항법에 관한 한 ‘인간컴퓨터’로 불리는 베테랑이었다.
천기장이 북태평양 항로로 비행하기 위해 선택한 항법장치, 즉 하늘길을 찾아주는 기계는 흔히 INS(Inertial Navigation System)로 불리는 자이로스코프를 이용하는 관성항법장치였다. 이 방식으로 프로그래밍된 비행기는 미리 규정된 지상의 지점들인 웨이포인트(waypoints)를 지나면서 자동으로 운항하게 되는 것이었다.
비행기 조종석의 운항용 스위치(knob)를 구성하는 항법모드는 4개였다. 헤딩(HEADING),VHF무선파거리측정계(VOR/LOC),계기착륙시스템(Instrument landing system ILS), 관성항법시스템(INS)이 그것이었다. <아래 그림 참조>
일단 그의 비행기 스위치가 INS 자동운항모드로 설정되면 그 다음부터 비행기는 이 항법시스템 프로그램의 지시대로 서울까지 자동으로 운항하게 될 터였다. 자동비행을 위해서는 먼저 헤딩 모드부터 선택해야 했다. 통상적으로 이 모드는 이륙 후 관제탑의 지시경로를 따르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섰다. 비행기가 이 모드로 비행하는 과정에서 정상 항로로 비행하는 것이 확인되면, 즉 항로상을 날면서 좌우 항로 오차거리범위를 크게 이탈하지 않으면 비행모드가 INS로 전환되도록 설계돼 있었다.
그것으로 자동항법운항 준비는 끝이었다.
이 INS 자동 항법 운항 시스템은 안정성이 높은 것으로 검증된 안전한 방식으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1983년 9월19일. KAL007피격 사건 증언을 위해 미의회 과학기술위원회 소위에 출석한 월터 루프시 미항공표준운항국 부국장은 이같이 증언했다.
“미일 합동조사반의 항법정확성 모니터링 시스템 조사결과 82년 3월1부터 9월 사이에 단 한 대의 비행기만이 이 기기를 사용했을 때 정상항로에서 17마일이나 벗어난 적이 있습니다. 최대 오차는 시간당 2마일(3.2km)에 불과했습니다. 이 항로를 비행했던 50만대의 비행기를 조사해 본 결과 시간당 평균 1마일(1.6km)의 항로를 벗어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이 날 KAL007기의 서울행에 앞서 헤딩모드로 ·비행기 위치를 확인시켜 줄 알래스카 앵커리지 비행장의 VHF전파방식 전방위 위치측정장비(VOR)가 고장을 일으켰다.
KAL승무원들에게 즉각 VOR이 수리중이라는 사실이 통지됐다. 사실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KAL007기는 앵커리지 서쪽 557km지점의 중간 비행항로 점검포인트점(waypoint)인 베델시 VOR관제탑에서 위치를 체크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런 과정들이 KAL007기 비행기 조종 및 계기 조작 과정에서는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았다.
사고 이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비행기록기(FDR)분석 및 시뮬레이션을 통해 KAL007기의 회전식 조작단추 위치가 INS모드에 있었지만 여기서 '자동운항모드'로 전환되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이유는 특이한 비행기 자동 항법조작 스위치의 작동 방식에 있었다. 이 스위치는 헤딩모드에서 INS모드로 전환시켰더라도 조작 시점의 비행기 위치가 정상항로 범위에서 좌우로 7.5마일 이내(폭)를 유지해야 했다. 자동운항컴퓨터용 SW는 그제서야 INS를 실행준비((INERTIAL NAVIGATION ARMED)가 아닌 INS 항법모드로 실행되도록 설계돼 있었다.
이 7.5마일 범위내에 있지 않으면 항법모드 전환이 안됐다. 반자동식이라 할 항법조작용 스위치의 결정적 약점이었다. 정상대로라면 KAL007 조종사들도 이륙 후 앵커리지 서쪽 최초의 웨이포인트 케언산(Mt. Cairn)<지도참조>을 지나는 시점에서 'INS실행준비(ARMED) 모드'가 'INS모드'로 바뀌지 않은 것을 모를 리 없었다.
KAL007은 이상하게도 정상항로에서 7.5마일(13.9km)이상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항법용 컴퓨터SW는 비행모드를 INS모드로 바꿔주지 못했다.
ICAO는 최종보고서에서 이렇게 결론 내렸다.
“비행기는 자동비행시스템으로 운항 중이었지만 (INS모드가 아닌) 헤딩모드에 있었고 조종사는 이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미항공우주국(NASA) 정보부가 공개한 보고서 결론과도 일치했다. 죽음의 비행이 된 KAL007기의 항로이탈은 이 때문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비극적인 KAL007기 사고를 계기로 이 항법전환 시스템은 보다 안전한 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밝혀진 듯 했지만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달을 정복하고 인공위성, 우주정거장에 우주 왕복선까지 쏘아올린 시대에 비행기가 지구상에서 자신의 위치도 제대로 모를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소련이 KAL007기가 민항기임을 알고도 격추시켰는지, 인간컴퓨터로 불리는 조종사가 비행기항로에 대해 그렇게 큰 실수를 하면서도 감쪽같이 모를 수 있었는지 등도 미스터리로 남았다. 레이건 미대통령은 비행항로를 이탈해 피격된 KAL007사태에 즈음해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한 대통령 명령서(Directive)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GPS(Global Positioning System)위성을 민간인들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개방하겠다.”
미국방부가 GPS위성 신호에 넣는 시간에러 암호를 풀어 미군이외의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GPS위성이 아직 계획대로 24개 모두가 발사된 것은 아니지만 4대의 위성이면 정확한 위치확인은 가능한 상황이었다.
기한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레이건의 약속은 미국연방항공청(FAA, Federal Aviation Administration)의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안보상의 이유를 내세운 국방부는 거세게 반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방부가 해군,공군 등과 함께 만든 GPS위성은 20년 이상 공들여 힘들게 진화시켜 온 군사적 노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세계 국가들 가운데 미국만이 갖고 있는 GPS위성은 미국의 전세계전략 및 국방·안보와 직결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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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O보고서: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1992년 12월 소련측으로부터 넘겨받은 블랙박스를 포함한 증거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발표했다. 조사 6개월만인 1993년 6월14일 나온 ICAO보고서는 다음과 같았다.
소련방공망은 KE007을 당시 근처 소련 캄차카 영공을 날면서 정보탐지 임무를 수행하던 미정보정찰기 RC-135로 혼동했다.
소련공군은 KE007을 캄차카에서 요격하려했으나 사할린섬까지 계속 날아갔다.
소련방공사령센터대원은 사할린 섬은 소련영공주권과 관련해 비행기의 정체와 위치에 대해 우려했다.
정체와 관련해 의심스런 부분이 있긴 했지만 비행기를 식별하려는 노력은 이뤄지지 않았다.
소련요격기가 민간항공기를 공격하기 전에 민항기에 대한 ICAO표준과 권고관행을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소련이 KE007 승무원과 무선 접촉을 하려는 어떤 시도도 이뤄지지 않았다.
KE007은 적어도 소련 수호이15전투기에서 발사된 2발의 공대공미사일을 맞았다.
회전하면서 돌던 비행기는 5천미터 상공에서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비행기는 바다에 떨어질 때 충격으로 파괴됐다.
KE007 조종사는 소련 전투기의 요격을 받기 전, 그리고 공격 받을 때 이들의 존재를 몰랐다.
통신테이프와 CVR · DFDR테이프에는 다른 데이터소스를 뒤집을 만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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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VR DFDR기록을 조사한 결과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기 전에 이 비행기에 광범위한 항공전자 및 항법시스템상의 미작동은 없었음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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