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86 칩셋을 이용한 서버의 표준화가 점차 희석되고 있다. CPU 제조사 인텔의 레퍼런스 아키텍처를 따르던 서버업체들이 사용자 요구에 최적화된 서버를 제품화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지난해부터 서버업체들은 저마다 독특한 형태의 서버 신제품을 공개하고 있다. IBM의 퓨어시스템을 필두로 델의 C8000, HP의 SL4500 같은 하이퍼스케일용 서버가 등장했다.
HP, 델, IBM 등 3대 서버업체는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특정 분야에 최적화됐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이전까지 보기 힘들었던 메시지다. 표준화된 서버를 내놓고 활용은 알아서 하라던 서버업체의 태도변화다.
■아예 새로 만든 IBM, 라인업 세분화 HP-델
전문가통합시스템으로 불리는 IBM의 퓨어시스템은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 등을 묶어낸 것이다. 거대한 박스에 CPU, 메모리, 저장장치, 네트워크 등을 모두 담은 컴퓨트 노드 여러 대를 장착한 형태다. 이 컴퓨트 노드는 기존 블레이드 서버와 유사한 형태지만, IBM은 굳이 서버로 명명하지 않았고, 비욘드 블레이드(Beyond Blade)라 부른다.
IBM 퓨어시스템의 컴퓨트 노드는 IBM에서 개발된 입출력(I/O)카드를 사용한다. 메인보드에는 전원관리를 위한 센서를 곳곳에 심어놨다. 컴퓨트 노드 한 대는 전원을 갖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용불가능하다는 점도 서버로 부르지 않는 이유다.
퓨어시스템은 컴퓨트노드 외에 저장공간 확장용도의 스토리지 노드와 각 모듈을 연결하기 위한 네트워크 노드를 하나로 합쳐야 완벽한 컴퓨터 역할을 한다. 당연히 타사의 제품과 호환되지 않으며, CPU, 메모리, 디스크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품도 IBM 외 제조사의 것을 사용할 수 없다. 퓨어시스템의 랙에 기존 파워시스템, 시스템x 등도 장착할 수 없다.
IBM 퓨어시스템은 클라우드 인프라 구축을 쉽게 해주는 퓨어플렉스, 애플리케이션 구축까지 간소화한 퓨어애플리케이션, 데이터분석에 특화된 퓨어데이터로 나뉜다. 각 시리즈별로 출시되는 순간 용도가 정해져있다.
HP와 델의 움직임은 x86서버의 라인업을 다양하게 만드는 형태다. 두 회사는 또한 기존 1U, 2U, 4U 표준 크기의 랙마운트 시스템 외에 다양한 규격의 서버 시스템을 내놓고 있다.
HP의 x86서버 제품 중 표준화보다 특화에 초점을 맞춘 것은 SL시리즈다. HP 프로라이언트 라인업 중 확장형 시스템 제품군인 SL시리즈는 최근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시스템의 규격도 기존과 다르다. 가장 최근 출시된 SL4500 제품군의 크기는 4.3U로 전에 없던 규격이다.
SL4500은 디스크를 4.3U 섀시에 최대 60까지 장착할 수 있게 했다. 저장공간 확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프로세싱 요소인 CPU, 메모리를 독립적인 노드로 만들었다. 전원과 냉각팬, I/O 모듈은 섀시 후면에 장착된다. I/O 모듈도 HP 개발품인 FlexLOM이다.
SL4500은 대용량 저장을 필요로 하는 오브젝트 스토리지나 하둡 같은 빅데이터 애플리케이션에 특화된 제품으로 소개됐다.
이밖에 SL시리즈는 CPU집적도를 필요로 하는 애플리케이션에 특화된 제품, 확장성에만 초점을 맞춘 제품 등으로 적합하다는 용도를 갖고 있다.
델의 경우 C시리즈가 HP의 SL시리즈와 비교된다. 델이 지난해 선보인 C8000은 4U크기 섀시에 컴퓨트 노드와 스토리지 노드, GPU-코프로세서 노드, 네트워크 노드 등을 조합하도록 만들어졌다. HP와 달리 폼팩터 규격은 4U 크기지만, 각 노드의 규격은 델 독자적이다. C8000은 하나의 섀시에 최대한의 컴퓨팅 자원을 집적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C시리즈보다 특화 서버 제작에 대한 델의 접근방식을 보여주는 건 따로 있다. 델의 데이터센터솔루션(DCS)란 서버다. 델 DCS는 정해진 모델도, 정해진 형태도 없다. 주문자의 요청에 따라 서버 섀시의 크기와 규격이 다르고, 내부 배열 형태도 제각각이다. 중국 텐센트 같은 웹서비스업체 주문으로 만들어진 서버는 세계 어디서도 사용하지 않는 모습이다.
C시리즈의 경우 델은 고성능컴퓨팅(HPC) 같은 대규모 서버환경을 용도로 설정했다. DCS의 경우 웹서비스, SNS 등 저마다 용도에 맞춰 그때그때 제작된다.
■고객이 조건을 걸고, 제조업체는 그에 따른다
서버업체는 그동안 x86서버를 타사와 차별화하기 힘들었다. 특히 가장 많이 판매되는 1U, 2U 크기 서버의 경우 공간의 제약 때문에 인텔의 CPU 칩셋과 메인보드 디자인을 그대로 채용하는 게 당연시된다. 서버업체는 랙마운트 대신 블레이드 서버의 메커니즘으로 차별화했다. 하지만 블레이드 서버도 어딘가에 최적화됐다고 수식되지 않는다.
과거 표준화의 길을 갔던 x86서버는 다시 특정 애플리케이션에 맞춘 특화된 형태로 분화되고 있다 최근 벌어지는 서버업체의 최적화 서버 출시 움직임은 시장 주도권의 변화와 관련된다. 주도권이 사용자로 넘어갔고, 사용자의 선택을 받기 위한 자세 변화다.
정석원 한국HP 차장은 “그동안 서버업체가 제품을 만들어내면, 고객은 출시된 제품을 어떤 용도에 사용할까 고민했다”라며 “지금은 그 순서가 뒤바뀌어서, 고객이 먼저 애플리케이션과 서비스를 고민한 후 서버업체에 그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라고 요구하는 시대”라고 말했다.
페이스북은 2011년 자체 개발한 서버를 공개하면서, HP, IBM, 델 등의 상용 제품을 사용하려 했지만, 자사의 서비스 구조 속에서 비용효율성을 충족하지 못해 사용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서버업체의 표준화된 제품은 하나의 완벽한 돌덩이와 같아서 유연하게 입맛에 맞게 사용하기 어렵다는 설명도 함께였다.
페이스북뿐 아니라, 구글, MS, 아마존 등은 수년째 자사의 서비스에 맞춘 자신들만의 서버를 운영하고 있다. 구글은 인텔로부터 세계 5위권에 포함되는 서버업체의 지위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을 정도다.
고객이 입맛에 맞는 서버를 사용하길 원한다는 점, 한편으로는 준비된 완제품만 있다면 얼마든지 구매할 용의가 있다는 점 등이 서버업체의 특화 서버 출시를 이끄는 동력이다.
IBM의 퓨어시스템의 사용법은 완전히 뒤바뀐 고객과 IT업체의 관계를 보여준다. 퓨어시스템은 어떤 애플리케이션을 쓸 것인가를 결정하면, 그에 따라 하드웨어 모듈 수와 구성을 조정해 쉽게 최적화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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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의 SL시리즈 역시 클라우드, 빅데이터 등 명확한 사용처에 맞게 서버업체가 미리 그에 가장 적합한 설계를 고민해 완제품으로 준비해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듈 방식으로 구성변경을 하는 것도 IBM 퓨어시스템처럼 미세한 구성 조정을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서버업체의 한 관계자는 “과거 서버업체가 여러 제조업체의 하드웨어를 원활히 혼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블레이드에서 독자적인 표준을 가졌던 것과 지금의 행태는 그 성격이 다르다”라며 “시장 변화 속에서 생존을 위해 따라가려는 몸부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