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느림보 인간과 나노초 시장의 부조화

일반입력 :2010/05/10 11:15

권화섭

뉴욕증시(NYSE)가 미쳤다. 짧은 시간에 많은 종목의 주가가 반 토막이 나거나 바닥까지 추락했다가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있는 가운데 다시 기적처럼 원래의 수준으로 회복되는 번지 점프를 하는 광경을 어떻게 달리 표현하겠는가.

현지시간으로 지난 6일 목요일 오후(한국시간 7일 새벽) 뉴욕 증시에서는 기상천외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2시40분 경 그리스 부채위기의 세계적 확산 우려로 인해 다우지수가 이미 500포인트나 밀려 있던 뉴욕증시는 불과 5분 후 다시 500포인트나 추가 폭락하면서 무려 1000포인트나 추락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렇지만 2분이 지난 2시47분에는 다시 급반등, 이날 하루 거래를 348 포인트 하락한 수준에서 마쳤다.

흔히 증권시장 시세 변동은 ‘랜덤 워크’(random walk)로 표현된다. 주가는 무수한 정보를 반영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누구도 정확히 그 등락을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뉴욕 증시의 대표적 지표인 다우지수가 짧은 시간에 1000포인트나 떨어졌다가 다시 650포인트 이상 회복하는 극단적인 널뛰기 장세를 벌일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아니 컴퓨터를 통해 초고속으로 자동적인 매매가 이루어지는 오늘날 증권시장에서는 조금의 시세 차이라도 생겨나게 되면 즉각 그 틈새를 파고들어 이득을 취하는 이른바 ‘고주파 재정거래(high frequency arbitrage trading)가 일어나기 때문에 대지진이나 세계대전과 같은 전혀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몇 분 사이에 다우지수가 500포인트나 출렁이는 사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날 뉴욕증시에서는 실제로 그런 기상천외의 사건이 발생했다. 도대체 글로벌 경제상황과 정치무대에서 어떤 격변이 있었기에 그처럼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는가? 뉴욕증시 거래소 측과 감독기관들이 즉각 사건 조사에 착수했지만 주말을 넘기면서도 누구도 정확한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그러나 범인의 그림자는 잡혔다. 그것은 ‘거래소 간 교차주문(ISO; Intermarket Sweep Order)'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초고속 컴퓨터 거래 시스템의 오류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뉴욕증시가 ‘번지 점프’ 장세를 연출할 때 그 방아쇠 역할을 했던 종목은 프락터&갬블(P&G)이었다. 세계 최대 생활용품 생산업체로서 아이보리 비누로 한국인들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이 회사 주식은 뉴욕 증시에서 가장 안정적인 종목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문제의 목요일 오후 2시45분52초 이 회사 주가는 한 순간에 35%나 폭락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2분이 채 지나지 않은 2시47분42초에는 거의 원래 시세와 같은 수준인 56.27달러로 회복되었다.

뉴욕증시 감독관들은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거래 자료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이런 시세의 격변이 있는 동안 P&G 주식을 거래한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거래도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ISO라는 자동매매 시스템 자체 내에서 엄청난 시세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기업경영자문회사인 액센추어(Accenture PLC) 주가는 더욱 가관이었다.

이날 오후 2시30분에 41달러였던 이 회사 주식은 47분46초에는 NYSE의 한 거래장에서 32.62달러로 거래되었고, 이로부터 4초 후인 47분50초에 장외 전자거래 시스템인 나스닥에서 5.54달러로 ISO 거래가 체결됐다.  곧 이어 3.04달러에 다른 거래가 이루어진 후 오후 2시47분53초에는 단 1센트까지 떨어졌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시장의 합리성을 그 존립 근거로 삼고 있다. 시장은 어떤 정책결정자보다 현명하기 때문에 시장을 최대한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며 정부의  개입은 경제위기나 다른 어떤 중대한 위험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자들의 경제철학이다. 그런데 세계 증시들 가운데 대표적인 시장인 뉴욕증시에서 어떻게 P&G와 같은 우량종목의 시세가 그런 엄청난 시세 변동을 보이고, 또 불과 몇 분 전에 41달러나 하던 액센추어 주식이 순식간에 단 1센트로 휴지조각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런 시장을 합리적이라고 믿고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가?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곧잘 다른 사람이나 요인들에 덮어씌우고 스스로의 죄과에는 눈을 감는 나쁜 버릇이 있다. 뉴욕 증시의 이번 사태는 결코 시장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증거는 아니다. 아니 그것은 느림보 인간이 초고속 컴퓨터를 이용해 신에게 돌려야 할 마지막 이득까지 스스로 챙기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각국 증권시장 당국자들은 시세의 격변을 다스리기 위해 ‘서킷 브레이커’(자동차단장치)라는 시세안정장치를 운용하고 있다. 물론 이 장치는 초고속 컴퓨터에 의해 작동된다. 그런데 이번 뉴욕증시의 번지 점프는 바로 기존 서킷 브레이커 시스템의 한계를 노출시키는 사건이었다. 느림보 인간의 발걸음이 기하급수적으로 약진하는 컴퓨터 시스템의 준족을 따라가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지게 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스위스계 글로벌 은행인 크레디트 쉬스(Credit Suisse)의 전자거래 책임자인 댄 메디슨(Dan Mathisson)은 “현재의 시스템에는 어떤 한 종목의 시세 폭락으로 인해 벌어지는 오류를 막을 아무런 메커니즘도 없다”고 지적한다.

뉴욕증시의 대격변은 바로 P&G라는 한 우량 종목에서 일어난 엉뚱한 시세 변동이 뉴욕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의 증시를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글로벌 대지진으로 터진 사건이었다. 당시 상황을 거슬러 추적해 보면 그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월스트리트 저널 보도에 따르면 문제의 그날 오후 2시 경 뉴욕증시 거래인들은 통화시장 쪽에서 심한 시세 변동을 느끼기 시작했고 금값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가는 더욱 밀렸다. 오후 2시40분 다우지수가 이미 약 500포인트나 떨어진 가운데 대형 초고속 거래회사인 ‘트레이드밧(Tradebot) 시스템스’가 자체 손실을 줄이기 위해 거래를 중단했고, 연이어 다른 초고속 거래회사들도 시장에서 철수했다.

그런데 거의 같은 시각에 뉴욕증시 객장에 대량의 P&G 매도 주문이 출현했다. 그것이 정확히 누구의 주문이었고, 또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형 초고속 거래회사들이 철수한 상태에서 P&G의 대량 매물이 출현하자 이미 폭락상태에 있던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동성보완 안정장치(Liquidity Replenishment Point System)’이라는 장치가 작동하면서 전자거래 시스템이 중단되고 인간이 직접 매매 체결을 하면서 시장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이른바 ‘저속 모드(slow mode)’ 시스템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2시45분52초부터 47분42초 사이에 일어난 뉴욕증시의 번지 점프는 외부 시장에서 초고속 컴퓨터를 통해 수백만, 수천만 건의 매각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느림보 인간의 수작업으로 매매 체결을 하는 인간과 컴퓨터의 격심한 엇박자 춤사위로 인해 벌어진 일대 희극이었던 것이다.

초고속 자동매매 시스템에서 매각 주문이 쏟아질 때 그에 상응하는 매입 주문이 받쳐주지 않으면 시세는 급전직하로 추락하면서 액센추어의 경우처럼 멀쩡한 종목 시세까지 완전히 휴지조각 상태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이런 사태의 재발을 막고 시장을 한층 안정적이고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정치는 격심한 시세 변동을 모두 투기로 몰아붙여 규제를 강화하려고 하고, 반면에 시장 관계자들은 기존의 서킷 브레이커 시스템의 결함을 보완하는 정도에서 파문을 수습하고 초고속 거래와 금융혁신을 최대한 자유로운 상태로 유지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정치의 과욕과 시장의 자율의지가 충돌해 문제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의 뼈아픈 교훈을 잊고 해외 은행 대형화와 초고속 거래기법을 무작정 따라가는 모험을 서슴치 않고 있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가?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