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전파법을 둘러싼 촌극을 읽는 법

전문가 칼럼입력 :2010/04/28 08:59

김국현

모든 질서에는 그 질서가 어울리는 시절이 있다. 예컨대 전파법이 그렇다. 십수년전만 하더라도 품질관리도 성능도 기능도 제 각각인 전파 제품들이 일국의 전파환경을 유린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현재의 법체제가 성립되었던 것. 당시의 사정에서라면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방면의 국제 기구들과 다각도의 모듈화된 협업이 만들어 낸 국제 표준화의 시대. 무선과 인터넷 기술에 관해서는 세계는 이미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그렇기에 분명 개선의 여지가 있고, 개선해 가야 한다. 특히 IMEI와 결합되어 개인전파인증을 강요 받으며 사실상 쇄국이 일어나는 현상은 전세계적으로도 매우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제도와 질서와 법과 규제에는 사연이 있다. 주민등록제도는 68년 청와대습격사건 후 향토예비군제도와 함께 마련되었다. 공인인증제도는 인감도장 날인에 익숙한 문화적 요인이 크다.

이렇듯 부조리해 보일 수 밖에 없는 모든 일도, 나름 억울하리만큼 절절한 사연을 안고 자라 온 것이다. 본인확인제니 게임등급제니 시민의 법감정으로는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다양한 규제도 마찬가지로 제각각 사연이 있을 것이다. 결국 그 사연은 이야기가 되고 신념이 되어 누군가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된다.

법이란 사회 현상의 하나임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법이라는 형식만 갖추면 따라야 한다는 형식적 법치주의의 사회. 그렇기에 법이란 그 사연을 포함하여 이해하며 존중해야 할 수 밖에 없고, 만약 부조리와 불합리를 느낀다면 사회 현상을 반영하여 법과 질서가 재구성되도록 목소리를 내는 것이 옳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고 지금까지 적어도 IT를 둘러싼 법과 제도의 부조리에 대해 그렇게 행동했다. 작년에 출간한 저서 "웹 이후의 세계"의 3장이 인터넷 규제 당사자 사이에서 일종의 참고서로 읽혀지고 있는 이유도 아마 그 덕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정세를 보면 아무리 봐도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의 연속이다. 언제부터인가 법은 법으로서의 신뢰를 잃고, 희화화되고 있다. 규제를 무시한 이는 영웅이 되어 바이럴 마케팅의 중심에 서고, 규제를 얕본 사이트가 규제에 따른 사이트의 트래픽을 쉽게 역전해 버린다.

최근 전파법을 둘러싼 촌극에는 할말을 잃었다. 대부분의 국가에는 나름의 전파법이 엄연히 상존한다. 이스라엘도 일본도 아이패드 수입을 둘러싼 홍역은 똑같이 겪었고 혹자는 이를 전파주권이라 칭한다. (이 이외의 나라에서는 이러한 일은 소유권 침해로 역고소를 받을 수 있기에 물론 일어나지 않았지만)

물론 상식적으로는 결국 같은 칩셋, 같은 회로를 쓰는 외산 완제품 한번 써보겠다는 이유만으로 '전파기기에 대한 개인적 운용 면허'를 획득해야 하는 것은 명백한 부조리지만, 적어도 3G나 무선랜처럼 ITU나 IEEE에서 인증된 전파 운용 방식의 제품에 대해서는 생산 각국의 인증제도를 쌍무적으로 수용하는 방안이 당연하지만, 해당 국가의 전파법은 일단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의무는 시장으로서의 국가를 존중하는 기업에게 있다. 만의 하나 예측하지 않은 전파 발신이 미사일이라도 발사하게 되면 어떡하나 기우해 온 것이 전파법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겪을 수 있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은 음주운전보다 무거운 형량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50만원짜리의 형식적인 스티커를 받는 '용자'들이 괜히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법은 법이기에 존중하며 지켜 온 것이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규제는 해소되었다. 허나 규제의 해소가 사회의 다양한 인식의 흐름이 재구성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단 하루 사이에 정부 내에서 일어난 촌극의 결과라니, 이 점이 슬픈 것이다. 합리적으로 이견 제기를 청취하고 토론을 거쳐 입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황당무계한 코미디가 벌어지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법과 제도와 규제와 질서가 밤새 재구성되는 사회.

이러한 사회의 비즈니스 게임에서 시장 참여자들이 할 수 있는 논리적 행동이란 무엇일까? 그들이 규제를 깔보는 입장을 취한다면 아마도 그들이 역시 영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풀려야 할 규제라면 어떻게든 풀린다며 마음껏 달려야 할까. 적어도 그렇게 달리면 홍보효과는 만점일 테니까.

법과 규제와 질서와 제도를 존중하는 사회. 대다수의 시민은 대개의 경우 이러한 사회를 믿고, 그 공평함에 대한 믿음에 의해 현대적 법치국가는 완성된다.

클라우드 플랫폼인 윈도우 애저(Azure)나 윈도우 마켓플레이스가 완성될 무렵, 내게 본사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조금 도와줘야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조금'은 아니었고, 국내의 법과 규제 덕에 국내 지급 결제 업체를 프로젝트에 개입시켜야만 했다. 당연히 한국만 사업 개시가 늦어진다. 물론 현상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도 있었지만 모두 적극적으로 현상을 존중하는 방안을 찾았다.

수많은 규제의 부조리에 흥분하는 일에 이제는 모두 지쳐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너머 최종 보스와의 대결은 시작도 되지 않았다. 인터넷과 웹의 자유와 그 힘을 믿는 이들이라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더 크고 더 깊숙하게 우리 안에 존재하는 비겁한 부조리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기인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이러한 늙은 가부장주의에서 파생한 병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정부에게는 중요한 일이 있다. 경기장에서 선수가 뛰지 않고 놀고 있거나, 엉뚱한 플레이가 벌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심판을 쳐다보게 된다.

정부란 그와 같은 심판이어야 한다. 우리가 스포츠 일반에 통용되리라 믿어지는 일반적 상식이 지켜짐을 안심하고 경기를 뛰고 또 관람하듯, 이 사회에도 스포츠 정신이나 전력질주의 즐거움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기를 심판과 주최측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건강한 정신을 복원하고, 이를 지킬 수 있는 제도와 심판을 되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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