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편집국에 새내기 직장인같은 젊은 여성 한분이 찾아왔다. 박지영이라고 했다. 홍보 담당자인줄 알았더니 CEO라고 했다.
벤처 열풍을 등에 업고 20대 CEO들이 쏟아지던 시절이었던 만큼, 그의 방문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습관대로 무슨 회사냐?고 물었다. 모바일 게임 사업하는 컴투스라고 했다.
휴대폰에서 게임? 말은 안했지만 어딘가 뜬구름 잡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폰을 많이 쓰는 지금이면 몰라도 무전기 같은 크기에 스크린도 작은 그때 그시절 휴대폰에서 게임을 한다는게 넌센스처럼 느껴졌다.
머지않아 전세계 사용자들이 휴대폰으로 컴투스 게임을 하게 될 것이다는 박 대표의 포부는 야심만만했지만 기자의 고정관념을 허물기는 역부족이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차이를 느끼려면 세상 공부좀 더 해야겠군 하는 생각이 스쳤을 뿐이다.
그후 박지영과 컴투스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끔씩 별 소식 없는 것보니 신입직원 같은 그 친구가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제대로 한번 경험했겠거니 하는 근거없는 상상을 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이다. 잊혀진듯 했던 컴투스가 세계 최초로 휴대폰용 자바 게임을 개발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결국 만들기는 만들었구나 싶었다. 팩트(Facts)는 거기까지였다. 만들어도 시장이 없을 텐데 하는 비관적인 예상이 뒤를 이었다. 기자는 모바일 게임은 시기상조라는 고정관념을 버릴 뜻이 없었다.
그랬는데, 곧바로 한국에서 휴대폰 게임 사용자가 늘고 있다는 기사를 후배들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2003년인가에는 미국 타임이 뽑은 '세계 14대 기술 대가(Global Tech Guru)'로 박지영 컴투스 사장이 선정됐다는 소식까지 접해야 했다. 기자의 고정관념이 뿌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판단미스를 100%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름 논리도 있었다. 박지영 대표는 모바일 게임으로 세계 시장을 노크하겠다고 했지만 컴투스가 해외 시장까지는 파고들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모바일 게임 특성상 해외로 가려면 현지 이동통신 서비스 업체를 잡아야 하는데, 변방의 벤처기업인 컴투스에게는 높은 진입 장벽으로 다가올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그래서였다. 기자는 후배들에게 모바일 게임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을 주문했다. 신중론은 몇년간 유효한 듯 보였다. 실제로 국내 모바일 게임 업체들은 2008년까지만 해도 내수 시장 공략에 주력했다. 해외 무대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패러다임 변화는 잡작스레 찾아오는 것일까? 애플 아이폰이 나오면서 모바일 게임 판세는 급변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중심에는 또 다시 컴투스가 있었다. 컴투스는 아이폰이 한국에 들어오기도전인 2008년말 애플 앱스토어에 모바일 게임을 올리고 글로벌 시장을 노크했다. 대박이었다. 앱스토어에 게임을 올려놓자마자 1위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세계 휴대폰 사용자가 게임을 쓰게 하겠다는 10년전 박 대표의 '꿈'이 현실화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바일 게임은 안된다는 기자의 고정관념은 깨졌다. 고정관념이 사라진 빈공간에는 모바일 게임에 대한 낙관론이 채워졌다. 인물 탐구를 위해 최근 박지영 대표를 찾아간 기자의 생각은 10년전 그때와는 이렇게 달라져 있었다.
■애플이 사고칠줄 예상치 못했다
궁금했다. 박 대표는 10년전 모바일 게임의 대중화를 예고했다. 애플 아이폰과 앱스토어같은 생태계가 열릴 것이라는 것을 박 대표는 실제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이폰이 나오면서 한발 앞서 기회를 찾아낸 것일까?
두 질문은 얼핏보면 같은 듯 보이지만 풍기는 뉘앙스는 아주 다르다. 하나는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에, 다른 하나는 현실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감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작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휴대폰은 항상 들고 다니잖아요? 기술이 발전한다면 휴대폰이 손안의 PC가 될 것으로 봤습니다. 물론 애플이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이런 흐름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만 상상했던 거죠.
들어보면 방향성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폰과 앱스토어같은 스타일의 등장을 예감하지는 못한 듯 하다. 애플 아이폰의 등장에 박 대표의 심장이 두근거렸던 이유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애플은 개발자와 중소기업들의 심장에 불을 지폈다. 해외 시장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유통망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애플의 폐쇄성이 도마위에 오르긴 하지만 컴투스와 같은 콘텐츠 업체 입장에서 애플은 든든한 동반자였다. 삼성에게 애플은 불편할지 몰라도 컴투스에게 애플은 고마운 회사였다.
박 대표만 아이폰을 보고 심장이 뛰었던 것은 아니다.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도 아이폰은 인터넷 포털과 SW사업을 10년씩해온 내게는 너무나도 새롭고 도전의식을 느끼게 하는 분야라고 했던 적이 있다.
'갑'이 '을'을 호령하는 역학관계가 엄존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콘텐츠 업체가 플랫폼 업체를 진심으로 극찬하는 장면은 심하게 생소하게 들린다.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갑'을 향해 '을'이 울분을 토하는게 우리에겐 익숙한 장면이다.
중소기업과의 상생이 화두로 떠오른 지금,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왜 콘텐츠 업체들이 애플을 지지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거기에 한국판 상생의 키워드가 담겼을 수 있다.
다시 컴투스 얘기다.
가슴에 불을 지펴준 애플이 가져다준 성과는 대단했다. 컴투스는 지난해 매출 317억원에, 영업이익은 53억원을 기록했다. 해외 현지법인을 포함한 해외 매출액만도 46억원으로 전년 대비 무려 3배 가까운 성장을 이뤘다.
사실 스마트폰 열풍은 국내에선 갑작스레 불어닥쳤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스마트폰 중심으로 전환됐다. 박 대표도 이 정도까지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다. 그래도 지금도 얼떨떨하다고 말한다. 위기감도 느낀다고 했는데, 엄살은 아닌 듯 보였다.
위기감은 항상 대안을 만든다. 그게 컴투스의 생존비법이다. 컴투스는 이제 애플 앱스토어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구글 안드로이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폰, 삼성 바다폰을 모두 겨냥하고 있다. 또 올해에만 최소 18종의 게임을 선보일 예정이다. 최근엔 모바일을 넘어 아이패드와 TV같은 새로운 플랫폼도 넘보기 시작했다. 디지털 컨버전스로 급부상하는 새로운 플랫폼에서도 전략적 거점을 마련한다는 복안이다.
스마트폰 열풍이 솔직히 많이 반갑죠. 그러나 겁도 나요.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글로벌 경쟁이에요.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마트폰 생태계는 점점 커지고 있지만, 정상의 면적은 그리 넓지 않다는 얘기로 들린다. 기회의 땅처럼 보이는 스마트폰 생태계도 피말리는 경쟁을 뛰어넘어야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박 대표가 계속해서 위기론을 내세우며 혁신을 강조하는 이유다. 위기감은 기술과 사용자 감성을 잡기 위한 투자로 연결된다.
박 대표의 모바일 게임론은 '5초'라는 말로 요약된다. 5초안에 사용자들에게 재미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면 그걸로 '아웃'이라는 것이다. 모바일 게임에서 5초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대단한 스트레스일 수 밖에 없다. 컴투스 모바일 게임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공개된다.
■작은 거인의 디테일형 리더십
박지영 사장은 스스로가 게임 마니아다. 게임이 좋아서 컴퓨터공학과에 들어갔고 친구들이 회사 들어갈때 게임 회사를 직접 차렸다. 캠퍼스 커플(CC)이자 공동 창업자중 한명인 이영일 현 컴투스 부사장과는 부부의 인연도 맺었다. 적절한 시기에 코스닥에 상장도 했으니,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나름 탄탄대로를 걸어왔다하겠다.
컴투스는 98년 창업이후 작은 부침은 겪었지만 바람앞에 등불 처지가 된 적은 없다. 게임 개발에 투자를 하다보니 순익이 줄어든 적은 있어도 매출은 꾸준히 늘었다. 닷컴 열풍이 극에 달했던 시절, 많은 청년 벤처인들이 화려하게 데뷔했다가 쓸쓸하게 또는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진것과는 분명 다른 길을 걸었다.
국내 벤처의 고질병인 국내용이라는 꼬리표도 벗어던졌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비교적 안정감있게 성장해온 셈이다. 초반부터 대박을 터뜨리고 시작했다기 보다는 마지막에 살아남아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 케이스다. 돌아보니 컴투스와 같은 벤처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컴투스는 박 대표를 포함한 3명이 창업했다. 박 대표는 창업자들중 홍일점이었다. 지분이 그렇게 높지 않았음에도 박 대표가 CEO를 맡은 것은 남자 두명이 군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번 맡은 CEO 자리는 결과적으로 장기집권(?)으로 이어졌다. 본인은 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박 대표의 장기집권은 꽤 오랫동안 계속될 것 같다. 아직 30대 중반임을 감안하면, 최장수 벤처 CEO로 기록될 가능성도 높다.직접 만나보면 알겠지만 박 대표가 풍기는 이미지는 '평범'이란 말로 압축될 것이다. 그는 화려한 언변을 갖춘 것도, 강력한 포스가 흘러나오는 외모도 아니다. 키가 작아서인지, 동생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10년전에도, 지금도 그렇게 보인다.
말투도 그때와 크게 달라진게 없다. 그는 인터뷰에서 그럴듯한 수사학을 많이 구사하지 않는다. 제목뽑기 좋은 직설적인 화법과도 거리가 멀다. 지극히 평범한 단어를 써가며 지극히 평범하게 얘기한다. 왠만해선 흥분하는 법도 없다. 냉정하리 만치 침착한 성격이다. 스스로도 다른 사람 얘기를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화시켜 듣는다고 말한다. '너무 진지한것 아니냐?'는 얘기를 종종 듣는 이유다.
그의 발언들이 조금은 재미없게(?)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말을할때 적절한 비유와 위트있는 문장을 중간중간에 넣어줘야, 튀어보이고 주목을 끌 수 있는데 그는 돌려서 말하지 않는다. 필요한 얘기만 하고 끝낸다. 그리고 다른 사람말을 듣는다.
정확하게 표현하긴 어렵지만 다른 CEO들과는 어딘가 달라 보이는 태도다. 만만하게 보인다고 하면 실례일 것 같고, 카리스마형이라기 보다는 타인과 수평적 관계를 섬세하게 추구하는 스타일로 분류하면 될 듯 싶다.
섬세하다는 말은 듣기에 따라 이것저것 다 간섭한다는 것으로도 들릴 수 있다.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옆에 그냥 있기만 해도 피곤하게 마련이다. 배려와 지나친 관심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부드러운 이미지로 통하는 것을 보면 박 대표의 섬세함은 긍정적인쪽에 가깝다.
10년전에 찾아와, 모바일을 게임하겠다는 말로 기자를 웃게 만들었던 20대 무명 벤처인 박지영은 10년후 결과를 갖고 기자를 놀라게 만들었다. 세상의 쓴맛을 보고 취직할줄 알았는데, 보란듯이 국내 모바일 게임을 대표하는 벤처인이 됐다.
박 대표에 대해 놀랄일은 앞으로도 계속 생길 수 있다. 그는 지난 10년의 성과를 발판으로 앞으로 세계 최고의 모바일 게임 회사가 되겠다는 도전장을 던졌다. 기술과 사람에 대한 과감한 투자도 계속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지금 이순간, 10년전 추억이 다시 떠오른다.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박 대표를 앞에 놓고 '만만치 않다'는식의 상투적인 회의론은 던지지는 못할 것 같다. 괜히 그렇게 말했다가 또 다시 '판단 오류'를 시인해야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 이번에는 나름 기대를 갖고 박 대표의 다음 10년을 지켜보고 싶다. 그 관찰이 왠지 굉장히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