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프라이즈 컴퓨팅도 성공하려면 애플처럼?

썬 집어삼킨 오라클, 하드웨어와 SW결합한 애플식 시스템 전략 본격 추진

일반입력 :2010/02/03 15:55    수정: 2010/02/03 17:29

황치규 기자

오라클이 마침내 썬을 집어삼켰다. 거대 SW업체의 하드웨어 시장 진출이라는 점에서 향후 행보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휴렛패커드(HP), 델, 시스코시스템즈 등 오랫동안 오라클과 협력해왔던 업체들과의 관계 정립도 불가피해졌다. 이래저래 오라클의 썬 인수는 엔터프라이즈 컴퓨팅 업계에서 초대형 이슈로 급부상중이다.

통합의 시대, 오라클 코드의 경쟁력은?

 

오라클의 썬 인수는 엔터프라이즈 컴퓨팅 시장에서 통합 열풍이 정점을 찍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물급 IT업체들은 그동안 연쇄적인 인수합병(M&A)를 통해 고객들에게 엔드투엔드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한 움직임을 가속화해왔다.

이에 따라 별도로 존재하는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 장비 시장은 최근들어 하나로 통합되는 양상이다. 하나의 업체에서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를 통합한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은 단숨에 대세가 됐다. 하드웨어와 SW가 화학적으로 버무려지는 장면도 수시로 연출된다.

오라클의 썬 인수는 이같은 추세와 맞물려 있다. 오라클은 썬을 손에 넣음으로써 서버, 스토리지, 운영체제, 프로세서, 미들웨어, DB, 비즈니스 애플리케이션에 이르는 광범위한 솔루션을 갖추게 됐다. IT서비스를 제외하면 IBM이나 HP보다도 많은 제품군을 갖췄다.

그런만큼 오라클은 고객들에게 자사 솔루션을 통합한 이른바 엔터프라이즈 시스템을 제공한다는 전략. 이를 기반으로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가격 경쟁력이 주목된다. 래리 엘리슨 최고경영자는 "IT비용은 인프라를 사는데서 나오는게 아니라 대부분 그것을 통합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면서 시스템 전략에 따른 비용 절감 효과를 전진배치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지난해 썬 인수를 발표당시에도 "오라클은 통합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회사다"면서 "고객들은 시스템 통합으로 비용을 줄이고 성능, 신뢰성, 보안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고 자신한 바 있다.

오라클의 행보는 70년대 한시대를 풍미하다 80년대 후반들어 분산형 기반 클라이언트 서버(CS) 모델에 주도권을 내줬던 IBM 메인프레임 코드의 부활을 연상케 한다. 메인프레임 역시 하드웨어와 SW가 통합돼 하나의 시스템으로 제공된다.

메인프레임은 사실상 엔터프라이즈 컴퓨팅의 시작을 알린 패러다임이었다. 수십년전 IBM은 고객이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하드웨어와 SW를 패키지로 묶어 제공하면서 주도권을 틀어쥐었다. 이후 다른 미니 컴퓨터 업체들도 이같은 대열에 합류했다. 독자적인 칩과 소프트웨어 그리고 네트워크 기술로 중무장하는 것은 70년대까지는 컴퓨팅 산업의 필승카드였다.

그러나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지지않을 해처럼 보였던 메인프레임의 아성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변화의 엔진은 클라이언트 서버(CS)에 기반한 분산형 컴퓨팅이었다. 유닉스가 선방을 날렸고 이후에는 인텔칩 기반 x86서버가 메인프레임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패러다임 시프트의 주역은 분야별 전문 SW를 개발하는 소프트웨어 업체들이었다.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SAP, 피플소프트, BEA시스템즈, 로터스 등은 메인프레임과는 다른 전술을 앞세워 기업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메인프레임이 공룡이었다면 CS에 기반한 이들은 발빠른 포유류였다. 변화에 대응하는데 있어 메인프레임은 CS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메인프레임에 과거의 유물이란 딱지가 붙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CS의 시대는 베스트 오브 브리드(Best of breed)의 전성기였다. 고객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IT인프라를 다양한 기업들로부터 구입한 뒤 데이터센터에서 통합했다. 고객들이 IT인프라를 여기저기에서 골라쓰면서 업체간 경쟁은 심화됐고 하드웨어와 SW 가격도 그만큼 내려갔다.

오라클이 들고나온 시스템 전략은 메인프레임이 컴퓨팅 시장을 지배하던 시절의 패러다임이 부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라클판 시스템 전략은 데이터베이스, 비즈니스 애플리케이션, 서버, 스토리지, 시스템, 네트워크 장비까지 한꺼번에 제공하는게 골자. 오라클은 이들 제품을 화학적으로 통합하겠다는 야심을 분명히 했다.

래리 엘리슨 CEO는 "오라클을 통해 고객들은 여러 업체에서 따로따로 인프라를 구입한 뒤 이를 통합하지 않고 완벽한 시스템을 구매하게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시스템 구축을 위해 IBM과 같은 서비스 업체들에게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였다.

오라클의 시스템 전략은 MP3플레이어와 스마트폰 시장에서 성공신화를 쏘아올린 애플의 방식과도 유사하다. 애플은 하드웨어와  SW 및 콘텐츠 서비스를 하나로 묶어 디지털 미디어 시장에서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오라클 역시 시스템 전략을 통해 하드웨어와 SW의 화학적 결합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하드웨어와 SW간 통합은 수익성을 강화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래리 엘리슨 CEO는 예전부터 애플의 방식을 주목해왔다.

그는 지난해 5월 "애플과 시스코는 상대적으로 높은 마진을 누리고 있는데, 이것은 하드웨어와 SW를 함께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하드웨어와 SW를 함께 디자인할 수 있다면 SW만 다루는 것보다 나은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라클 시스템 전략도 이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애플의 방식이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도 먹혀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드웨어와 SW가 통합된 어플라이언스 보다는 이기종 환경에서 오픈 시스템 구축을 선호하는 고객들이 적지 않다. 그런만큼 오라클판 시스템 전략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다.

가브리엘 컨설팅의 댄 올즈 애널리스트는 오라클의 썬 인수는 지난 10년간 가장 의미있는 거래라며 오라클은 산업의 룰을 바꾸고 새로의 시대를 도래를 알렸다고 평가했다. 일루미나스타의 고든 하프 애널리스트도 통합 추세를 감안해 오라클의 행보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우려도 적지 않다. 특히 경쟁이 줄어드는 것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고객들은 시스템을 구입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겠지만 한 회사에 의존할 경우 궁극적으로 고객의 가격 협상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업체간 역학관계, 관심집중

오라클의 썬 인수로 IT업계 역학 관계도 재편이 불가피해졌다. 오라클은 그동안 HP, 델, 시스코 등 하드웨어 업체들과의 협력을 통해 IBM, MS, SAP와 경쟁해왔다.

그러나 썬 인수로 하드웨어까지 확보한 만큼, 오라클발 협력 네트워크는 빠르게 빈틈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협력에 참여했던 업체들이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가려는 듯한 분위기가 진하게 풍긴다.

시스코는 지난해 네트워크와 서버를 통합한 유니파이드 컴퓨팅 시스템(UCS)를 내놓고 서버 시장에 뛰어들었다. HP, 델, IBM과 경쟁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시스코는 최근 EMC, VM웨어와 손잡고 차세대 클라우드 컴퓨팅 시장 공략을 위한 합작법인까지 세웠다.  

HP의 독자노선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HP는 지난해말 쓰리콤 인수 카드로 시스코에 맞불을 놨다. IT서비스 업체 EDS까지 집어삼키며 IBM과의 한판 승부도 예고했다. 최근에는 MS와 클라우드 동맹까지 맺었다. 애널리스트는 HP와 MS간 동맹을 오라클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하는 모습. 오라클은 MS와 DBMS 시장에서 치열하게 겨루고 있다.

오라클은 기존 협력 전략에 대해서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란 입장이다. 특히 델, HP와는 계속 협력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래리 엘리슨 CEO가 직접 나서 델과 HP와 사이가 틀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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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엘리슨 CEO는 썬을 인수하더라도 경쟁이 치열한 보급형 서버 사업에는 주력하지 않겠다고 강조해왔다. 지금 들어가봤자 HP와 델이 이미 분위기를 틀어쥔 시장 판세를 뒤집기는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만큼 보급형 서버 시장에선 HP, 델과 오라클간 협력이 유지될 전망이다.

그러나 고성능 서버 시장에선 경쟁이 불가피할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성능 시장을 겨냥한 오라클판 시스템 전략은 HP 등의 주력 시장과도 겹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