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으로 벽을 가르키며)“저게 뭐죠?”
PMP시장서 ‘빌립’이란 브랜드로 작년 한해 고속성장을 기록한 유경테크놀로지스. 이곳 유승진 부사장의 집무실을 기웃거리던 기자의 눈앞엔 화이트보드 위에 오밀조밀하게 그린 세계지도가 펼쳐졌다.
아시아태평양 시장을 파란색 유성잉크로 다이렉트 공급지역으로 구분하고, 유럽시장은 빨간색 잉크를 꼭꼭 눌러 쓴 듯 글자체 굵기가 더욱 부각돼 주력시장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아,. 그거 지금 보시면 안되는데요”
유승진 부사장은 세계지도를 등질 수 있는 자리로 기자를 안내한 뒤 말을 꺼냈다. “요즘엔 수출하는 사람이 애국자라고 하지 않나요?” 기자도 이렇게 받아쳤다. “해외수출을 많이 생각하나보죠?”
2008년 끝 무렵 인텔이 전세계적으로 MID(모바일인터넷디바이스) 상용화에 팔을 걷어 부칠 당시 대부분의 기기 제조사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넷북 열풍이 고조된 탓이다.
인텔과 제조사간에는 “이 와중에 누가 MID에 관심을 가지겠나”라며 실랑이가 끊이지 않았다. 인텔은 대폭적인 마케팅 비용과 개발지원 등을 약속하며 제조사를 달랬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처럼 모두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유경테크놀로지스는 MID 신제품 3종(빌립 S5, S7, S70)을 개발하며, 빠르고 과감한 행보를 내딛기 시작했다.
업계에서 “무리수를 두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유승진 부사장에겐 이미 MID로 첫 수출판로를 개척한다는 계산이 서 있었다.
■ “한국發 MID, 독보위치 구축 “가능성 있다”
유럽엔 와이맥스가 내장된 쓸만한 단말기가 없단다. 유승진 부사장의 설명에 따르면 통신서비스 사업자는 많지만 전세계적으로 2.3, 2.5, 3.5기가 대역에 꼭 맞는 기기 공급이 부족한 실정이다. 시장활성화가 이처럼 더딘 이유는 쓸데가 별로 없다는 것.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해외시장은 국내와 달리 PMP시장이 그리 활성화 돼 있지 않죠. 불법 다운로드가 원천적으로 어렵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PMP로 영화나 TV를 보는 장면은 대중교통이 잘 갖춰진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일 뿐이에요”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북미나 유럽에선 이동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목적으로 PMP를 구매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단다.
이순간, 묻게된다. MID도 출신성분을 분석하면 네트워크가 가능한 PMP가 아닌가. 이 대목에서 유 부사장은 할말이 많은 표정이다.
“지금까지 실제로 MID를 발표한 몇몇 업체들을 둘러보면 제대로 장사한 곳이 드물죠. 이유는 배터리 사용시간이 적어 할게 없는 디바이스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지지부진의 원인을 대만 제품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대만산은 가격도 비싸고, 사용시간도 짧고, 성능도 애매하고, 속도도 더디죠. 이런 제품에게 시장은 결코 관대하지 않아요. 시장판로가 열리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하지만 한국제품은 이들의 취약점과는 정반대에선 제품이죠. 특히 빌립은 성능뿐 아니라 한번 충전으로 6시간 이상 사용할 수 있기에 활용범위가 넓어요”
유사장의 말에 따르면 장시간 사용할 수 있는 MID는 물류시스템의 RFID 단말기를 대신하거나 설문지 플랫폼으로써 실시간 여론조사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등 장시간 이용할 수 있다는 전제만 따라주면 각종 산업현장서 다양한 목적으로 확대, 유용하게 다뤄질 수 있음을 강조했다. 실용이야말로 그가 주도하는 변화의 나침반이란 얘기였다.
이제 막 MID에 간을 본 시점에 해외시장 출루에 나선 유경이 어떤 전략을 들고 나올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 진입장벽 돌파구 ‘기대기’ 전략이 주효
불황의 파고가 몰아치고 있다. 실물경기의 한파로 국가별 보호주의 색체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해외시장 진출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이유다. 어느 정도 근사한 해법이 없다면 ‘백전백패’다.
유경은 올해 인사에 영업마케팅 조직을 통합하고, 해외마케팅 부서를 신설했다. 이전 ‘수동적으로 움직인다’는 해외 바이어들의 지적을 받은 후 곧바로 내린 조치다.
해외전시회도 적극 참여할 계획이다.
지난 소비자가전쇼(CES) 2009에 이어 이달 개최되는 전세계 모바일전시회 MWC(Mobile World Congress)에도 전시부스를 설치한다. 오는 3월엔 정보통신 박람회인 ‘세빗(CeBIT) 2009’에도 예약을 걸어뒀단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아야죠. 전세계 공급 가능한 예상지역을 점쳐 놓고 저울질 하고 있어요. MID 샘플선적은 이달 끝나고, 3월~4월에 본격적인 수출선상에 올릴 계획이죠.”
처음부터 직접판매채널을 뚫을지 아니면 남아프리카 등 유통망이 잘 갖춰진 곳에서 서비스센터, 유통라인, 소매상을 모두 갖춘 빅바이어들과 함께 움직일지를 두고 객관적인 기준을 강구 중이란다.
또 마케팅 비용에 관한 ‘실탄’은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MS)로부터 지원받게 된다. 일종의 기대기 전략이다.
“와이맥스 모듈을 넣을 수 있는 MID에 대한 인텔의 관심은 큽니다. 초입 시장이라 마땅한 단말이 없는 탓이죠. 이 때문에 인텔과 긴말하게 움직이게 될 거에요.”
MID는 에코시스템의 초창기라 매우 활발하다. 인텔에선 큰 도매상을 연결해 주는 등 백방으로 한국중기업 진출에 지원을 아끼고 않고 있으며, 특히 국가별 매출 성과를 중요시하므로 제 식구 챙기기에 적극 나설 것이란 게 유사장의 해법모색이다.
중소업체들은 자금사정으로 해외진출이 어렵다는 얘기가 매일 터져 나온 탓에 멀쩡한 업체들도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실정. 이럴 때 협력사의 손을 빌려 어렵지 않게 해외 소비자와 ‘쾌통’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적벽대전에서 힘들이지 않고 대승을 이끈 제갈공명의 지혜인 셈이다.
■안드로이드에 ‘군침’
전문가들은 올 하반기 모바일 디바이스의 운영체제(OS)는 리눅스와 윈도XP ‘양강 구도’가 아닌 ‘안드로이드 VS 윈도 모바일’로 판도가 뒤바뀔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빌립은 모바일 디바이스 시장을 연속적으로 리더 하기 위해선 안드로이드 플랫폼은 필수항목으로 관측하고 있었다.
“리눅스 베이스에 제품들이 모조리 실패했어요. 말로는 오픈 솔루션이라고 하지만 사용자 입장에선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완전히 폐쇄된 구조라고 봐야 되요. 하지만 안드로이드는 이야기가 다르죠”
정확하게 말하면 안드로이드 역시 리눅스의 한 축이다. 다만 참여자가 많고 앞으로 이 플랫폼을 통해 해볼 수 있는 서비스들이 늘고 있기에 리눅스처럼 무력하지는 않을 것이란 게 유사장의 판단이다.
다만 현재로썬 지원되는 시스템 드라이브가 없고, 이윤에 따른 한국 IT시장의 냉엄한 현실을 놓고 볼 때 관련 디바이스를 내놓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 시기상조란다.
■소녀시대와 메가스터디, 상관관계
기자가 유사장을 만난 날, 공교롭게도 인기여성그룹 소녀시대의 CF촬영일과 겹쳤다. 억대 스타마케팅을 펼친 유경 안팎의 평가가 궁금했다. 업계 관계자들의 뒷말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아시아시장서 빌립의 인지도를 올리는 데 기여했으나 제품판매와 직결됐다고 보긴 어려워요. 다만 ‘배용준이나 소녀시대를 모델로 쓸 수 있는 회사’라는 이미지가 크게 부각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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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회사의 재무와 신뢰성과 연관시켜 보는 바이어들이 많았단다. PMP 이야기로 기울다 보니 메가스터디를 지원하지 않는 PMP에 대한 언급도 뒤따랐다. 중고등학생을 겨냥한 PMP는 대부분 학습용 보조기기로, 제공된 콘텐츠에 따라 판매량이 갈린다.
하지만 빌립의 PMP는 학생들에게 인기 상종가를 치고 있는 메가스터디가 지원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PMP모델 X5의 경우 5만대 판매실적을 올렸다. 특정 콘텐트가 시장을 독점하는 상황에서 이례적인 성과다. 유사장의 얘기는 의외로 간결했다. “있었다면 두 배 이상 팔았을 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