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디지털큐브는 휴대용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 생산라인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박스포장을 마치고 출하를 앞둔 제품에 대해서도 긴급 회수조치가 내려졌다.
“아니, 무슨 일이야” 물류창고 직원들이 군데군데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새로 온 사장의 지시야”라고 대답하던 작업반장은 손을 양쪽으로 벌리며 ‘자세히 모르니 묻지 마라’ 식의 제스처를 취했다.
당시 박스엔 고속하향패킷접속(HSDPA) 기술을 적용해 보다 빠른 무선인터넷이 가능하고 처음으로 3차원(3D) 기반 유저인터페이스(UI)를 채택한 PMP ‘T5’가 들어있었다.
나름 '거리'가 있는 제품이었다. 텔슨과의 인수합병과정에서 PMP 신제품을 내놓지 못하면서 공백이 길어지던 디지털큐브로선 밀어부칠만한 카드였다. 팽팽한 힘겨루기를 벌였던 코원과 레인콤이 PMP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을 막을 '견제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제품 생산을 중단해야 하는 디지털큐브 직원들의 속이 타들어갈 수 밖에 없던 이유다.
1위 업체의 따끔한 맛을 보여줄때라며 야심차게 개발해온 제품을 시장 출하직전에 ‘올 스톱’시킨 초유의(?) 사태. 디지털큐브 지휘봉을 사로잡은 채종원 사장의 데뷔는 이렇게 이뤄졌다.
”치료부위는 과감히 들어내야”
“10월 신제품이요? 아! 제품 완성도가 올라갈때까지 출시를 미루라고 지시했죠”
채종원 디지털큐브 사장은 신제품 생산 중단에 대한 직설적인 수사학을 구사했다. 더 이상의 추가질문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당시 디지털큐브는 ‘아이스테이션 신제품 비주얼 공개’라는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제품 판매길이 막히자 PR팀이 내놓은 임시방편이었다.
최근 기관 및 개인 투자자 모집에 안감힘을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요?라고 묻자 (태연한 표정)“네 맞습니다”란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궁금해졌다. 이런 얘기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채 사장은 숨길 이유가 뭐 있나요? 다 아는 사실인데..라고 웃고 넘어간다.
마른 체구의 그는 인터뷰에서 잘 웃었다. 하지만 껄끄러운 질문에는 피해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함께 인수합병 업무에 뛰어든 김태섭 대표는 텔슨과 디지털큐브의 종합경영을 진두지휘했고 채종원 대표는 디지털큐브의 환부를 찾아내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기술자, CEO인 그에게 가장 적합한 자리란 판단에서다.
“텔슨전자의 생산조직과 디지털큐브의 연구, 마케팅의 결합은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죠.”
채 사장은 인수 전 두 업체가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는 ‘궁합’이 참 좋았단다. 차세대 멀티미디어 표준경쟁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았고, 표준기술을 함께 만들어 이 참에 해외시장까지 발을 넓힐 계획이다. 채 사장이 품질문제에 세게 나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품질저하로 고객들 멀어지죠. 시장점유율 떨어지죠. 제 값도 못 받는 수익구조악화가 반복되죠. 이 고질병부터 뿌리뽑아야죠” 채종원 사장은 '우리가 만족하지 않은 제품은 내보내지 않는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한 대책으로 채 사장은 텔슨의 품질관리 인증체계를 디지털큐브에 똑같이 적용할 계획이다. 기업경영전략인 ‘식스시그마’(6σ)도 도입할 예정이다.
“데이콤시절 LG그룹이 식스시그마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을 오랜 기간 지켜보며 상당히 큰 감명을 받았죠. LG전자의 오늘은 식스시그마가 없었다면 보장받지 못했을 겁니다. 채종원 사장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품질문제를 헤쳐나갈 길은 식스시그마를 제대로 도입해 생산과 연구부문에 올바르게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말 출근자가 가장 많은 14층…안살림 잘 챙길 터”
채종원 사장에 말에 따르면 이 회사는 괴짜군단이다. 그는 디지털큐브의 가장 큰 장점을 ‘직원들의 열의’로 꼽았다. 회사가 위치한 임대오피스(에이스테크노타워 10차)에서 주말에 출근하는 직원들이 가장 많은 층(14층)이란다.
“눈빛만 봐도 대충 알죠. 놀러 왔는지 일하러 왔는지. (주말에 출근하는)이런 직원들이 있는 한 디지털큐브는 이대로 쭉 가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원들이 못 미덥고 불안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며 해볼만한 게임이란다. 그렇다고 해도 인수합병이란 과도기적 상황에서 선봉장인 채 사장의 역할은 그 어느때보다 클 수 밖에 없다. 그의 경영방침은 간섭은 줄이고 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끌어올리는 것이다.
“업무간섭이 없는 대신에 참여도를 놓이는 게 핵심이에요. 분기별로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제도적 장치를 들어오자마자 만들었습니다. 제품과 시스템의 취약점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이고, 회사 미래에 대해서도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목표를 초과 달성하면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시스템도 조만간 갖출거에요.
채종원 사장은 이같은 시스템은 지난번에 근무한 회사에서도 성공적으로 운영한 바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학습 중독증(?)’에 빠질 준비됐나요
채종원 사장은 향후 국내 PMP 시장에서 점유율을 70% 이상 끌어올리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무(無)안경 방식 3D 입체특허를 적용한 PMP 제품으로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디지털큐브는 M&A(인수합병) 과정에서 직원수에 변화가 없었다. 승부스를 띄우려면 한정된 자원으로 포트폴리오를 잘 구성해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경기 불황에 맞는 사업모델 발굴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채 사장은 교육용 콘텐츠를 주목하고 있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 부모님들은 논과 밭을 모두 팔면서 자식교육에 힘썼죠. 이런 부모님들의 교육 열정은 시장이 아무리 어려워도 주머니를 열게 합니다.
채 사장은 조만간 선보일 3D 모듈 장착 PMP는 강사가 질문을 던지고 맞추는 식의 양방향 소통이 가능하며, 모든 비주얼이 3차원이라서 학생들의 주목도가 높아질 것”이라며 PMP와 교육 콘텐츠를 연계한 사업에 강한 기대감을 보였다.
HSDPA 모듈을 장착한 PMP에서 다운로드 과정도 간소화하기로 했다. 채 사장은 모 경쟁사가 내놓은 와이브로 PMP는 서비스 지역이 수도권에 한정돼 있지만 HSDPA는 전역을 커버할 수 있어 차별화 포인트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다만 가격정책이 걸림돌이다. 이에 대해 채 사장은 “통신사업자와 기존보다 더 낮은 정액서비스 모델로 협의 중에 있다고 말했다.
HSDPA 지원 PMP의 성패는 통신요금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신 공룡을 상대로한 협상이 쉬운 것도 아니다. 게다가 3D 스크린이 장착된 PMP는 지금보다 10% 정도 가격이 오를 전망이다. 어려울수록 가격에 더 민감한 소비자들을 어떻게 설득할지도 풀어야할 숙제다.
디지털큐브는 텔슨과 KDC의 해외 네트워크 유통망을 통한 글로벌 시장 진출도 모색중이다. 해외 무대 경험이 적은 디지털큐브에게 해외 시장 개척은 성격이 다른 게임이다. 모두가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다. 이를 풀어야할 책임은 채종원 사장에게 있다. 그가 이끄는 디지털큐브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