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원준과 SAP 그리고 고성장 시나리오

일반입력 :2008/09/19 12:11

황치규 기자 기자

지난 수년간 한자릿수 성장을 해온 SAP코리아가 올해부터 2010년까지 연평균 37~40% 성장하겠다며 '완전 공격 모드'로 전환했다.

경기 불황에다 SAP의 '주특기'인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장이 어느정도 포화됐음을 감안하면 심하게 파격적인 목표치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구경꾼에게는 다소 비현실적으로도 비춰진다. 자연스럽게 과연?이란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그러나 SAP코리아가 이런 목표를 세웠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름 주판알을 튕겨보고 '할만하겠다'는 판단이 섰을 수도 있고 본사에서 한국도 이정도는 해야 한다는 '오더'(Order)를 내렸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어찌됐든 SAP코리아는 숫자를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된다는 가정하에 회사 조직 및 마케팅 전략을 펼칠 수 밖에 없다.

SAP코리아는 과연 고성장을 위해 무엇을 키워드로 뽑았을까? 바로 '탈ERP중심주의'였다.

형원준 신임 SAP코리아 사장은 지난 17일 취임 기자간담회를 통해 ERP를 넘어 CRM, SCM, SRM, BI 등에 전력을 전진배치시켜연간 37~40% 성장을 이뤄내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을 제시했다. ERP는 꾸준히 해나가면서 다른 분야에서 국내 시장 지분을 확 늘려 파격적인 고성장 시나리오를 현실화시키겠다는 얘기였다.

SAP코리아의 경우 전체 매출에서 ERP가 차지하는 비중이 80%를 넘는다. 50%밑으로 떨어진 본사 사정과는 '엇박자'다. 그만큼 SAP코리아는 아직 ERP가 지배하는 구조다. 한국 진출 13년만인 지난해 처음으로 매출 1천억원을 돌파할때도 사실상 ERP가 '원맨쇼'를 펼쳤다. 고객관계관리(CRM)와 공급망관리(SCM) 등 다른 솔루션 기여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형원준 사장은 이같은 구조를 무너뜨려 SAP코리아에 '고속성장엔진'을 장착하겠다고 했다. 국내 CRM, SCM, 비즈니스 인텔리전스(BI), 제품수명주기관리(PLM) 시장을 상대로 전방위 공세를 펼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ERP중심의 매출 구조에 대폭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가 무엇을 하려하는지 말하고 있다.

형원준 사장은 가트너 자료를 근거로 SAP 본사는 이미 CRM과 SCM 시장에서도 1위임을 강조한다. 그런만큼 국내서도 못할게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이들 분야에 크게 집중하지 않아 ERP 의존도가 높을 뿐이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 시장에서 SAP는 매년 30~40% 성장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계속 ERP에 의존한 전략을 펼친다면 두자리수 성장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SAP 역시 글로벌하게 보면 ERP 성장율은 한자리수로 떨어졌고 CRM, SCM 등 다른 솔루션들이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은 이들 분야에 집중하지 않았다. 때문에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 그러나 미국처럼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다.

이쯤해서 묻지않을 수 없다.

형원준 사장이 전략적 요충지중 하나로 꼽는 SCM은 그가 SAP코리아 지휘봉을 잡기전 몸담았던 i2테크놀로지가 국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 포스코, LG전자 등 내로라 하는 국내 기업들이 ERP는 SAP나 오라클을 써도 SCM만큼은 i2를 도입했다. 이같은 판세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형 사장이다.

이런 그가 SAP코리아로 오더니 SCM 시장에서 지분을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i2와의 정면승부도 피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다.

5년전만 해도 ERP 기반 업체들이 제공하는 SCM은 한계가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SAP도 SCM 분야에서 i2가 갖는 능력을 수용했고 투자 규모에서는 오히려 앞서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많은 SCM 전문 업체들은 합병됐거나 사라졌다. SAP 등이 펼치는 통합 플랫폼 전략이 적중하고 있는 것이다. SCM 시장도 이제 i2를 대체하는 쪽으로가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국내 시장에서 i2 고객들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하겠다.

SAP는 얼마전 서비스 요금을 단계적으로 인상해 2012년까지 라이선스 비용의 22%를 유지보수료로 책정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한국오라클이 유지보수 요율 인상 문제로 국내에서 고객들과 적지않은 갈등을 겪었던 것을 감안하면 SAP코리아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형 사장은 본사 차원에서 결정된 사안인 만큼 국내서도 정책을 그대로 적용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본인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지보수료 인상이 파트너들에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상생전략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형원준 사장은 고성장은 아니지만 ERP 시장도 계속해서 키워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한 대기업군과 중견기업 그리고 중소기업으로 시장을 나눠 강도높은 현지화 전략을 추진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를 위해 파트너 지원 체계를 손질하고 임원급 인력을 신규로 채용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중소기업 시장을 겨냥한 서비스로서의 소프트웨어(SaaS) 솔루션도 곧 내놓겠다고 덧붙였다.

형원준 사장 체제에서 SAP코리아를 상징하는 코드는 ERP를 벗어난 영토확장이다. 엔터프라이즈 SW 시장 특성상, 업계 판세가 단숨에 뒤집힐 것 같지는 않지만 SAP코리아가 CRM이나 SCM 등 ERP가 아닌 분야에 예전과는 다른 자세로 접근하려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떤 성적표를 받아들지는 미지수. SAP코리아의 고성장 시나리오가 나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