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액티브X’…세계 인터넷과 한국은 엇박자

일반입력 :2008/07/01 15:09

김태정 기자 기자

인터넷을 처음 배운 10년여 전부터 오로지 익스플로러만 사용해온 직장인 박모㉜씨. 사실 그는 익스플로러 이외에 다른 브라우저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이랬던 그가 최근 언론과 네티즌 사이에 화제가 된 ‘파이어폭스3’를 처음으로 다운받아 사용했다.

하지만 박씨와 파이어폭스의 인연은 몇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파이어폭스로는 박씨가 애용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결제 서비스가 되지 않았기 때문. 박씨는 “주변의 말처럼 파이어폭스가 빠르고 편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온라인 금융거래를 못하는 이상 사용할 맘이 없다”고 말했다.

◇사진설명 : 파이어폭스 브라우저로 A 은행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나오는 화면. 서비스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

박씨처럼 파이어폭스나 오페라나 등 다른 브라우저를 사용해보려다가 온라인 금융거래 장애를 겪고 익스플로러로 돌아오는 이들은 종종 눈에 띈다. 아무리 다른 브라우저에 다양한 장점이 있다 해도 온라인 금융거래를 포기하는 것과는 바꿀수가 없는게 현실이다.

■ 액티브X 없이 한국서 인터넷 힘들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국내 온라인 금융 사이트 대부분이 익스플로러에만 맞춰 제작됐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거래에 필요한 각종 프로그램은 대부분 익스플로러의 파일 유포 툴인 ‘액티브X’를 통해야만 다운받을 수 있다.

◇사진설명 : 국내 사이트서는 간단한 음악이나 동영상 재생에도 액티브X가 필요하다.  

금융 사이트뿐만이 아니다. 카페나 일반 게시판 등에서도 액티브X는 거의 필수 조건이다. 당장 간단한 음악이나 동영상 재생만 해도 필요한 파일을 액티브X로 다운받은 뒤에야 가능하다.

때문에 액티브X를 지원하지 않는 다른 브라우저들의 점유율은 모두 합쳐도 5% 미만인 기현상이 한국에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만큼은 ‘익스플로러’가 웹브라우저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반면, 외국의 경우 사이트 대부분이 HTML 공통 표준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익스플로러 이외에 다른 브라우저에도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 이결과 유럽에서는 파이어폭스의 점유율이 40%에 육박하고 있다. 익스플러로가 여전히 1등이지만 더 이상 ‘불멸의 브라우저’는 아니다.

■ MS가 액티브X 없애면 대 혼란?

물론, 본인에게 익스플로러가 편하다면 억지로 다른 브라우저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수 있다. 익스플로러 독점이라는 시장 구조상의 문제도 일반 사용자들과는 거리가 있는 얘기다.

가정이기는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액티브X를 어느 날 갑자기 없애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아마도 액티브X에만 맞춰 개발된 국내 사이트들은 초기 알고리즘을 뜯어 고치느라 홍역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

실제 이런 재앙은 지난해 초 윈도비스타의 등장과 함께 예고됐다. 당시 부푼 기대로 비스타를 설치해 본 한국 네티즌들 중 다수는 난처한 일을 겪었다. 비스타가 액티브X 기능을 크게 제한해 인터넷 뱅킹이 먹통이 됐던 것.

사안이 심각해지자 당시 정통부와 행자부까지 나서 국내 인터넷 환경과 비스타의 호환성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한 소스코드를 MS와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부는 ‘너무 MS에 특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냐?’는 네티즌들의 비난에 시달렸다.

MS라는 특정 업체 제품에 의해 국가 정책에 혼선이 왔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이다. 심지어 이 사건을 전한 지디넷코리아의 기사가 뉴욕타임스에까지 실려 한국 IT 정책이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 네티즌들이 액티브X가 가진 의미를 다시 곱씹어보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1년 반이 넘은 현재, MS는 다시 한번 액티브X 기능을 줄이려고 하고 있다. 당장 올 하반기 출시 예정인 익스플러로8만 해도 액티브X 기능이 이전보다 꽤 제한됐다. MS의 크리스 윌슨 이사는 “익스플로러8은 사용자가 웹사이트에 따라 액티브X 적용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며 “익스플로러7에 비해 액티브X 기능을 줄이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MS의 조치는 액티브X가 악성코드 유포에 쉽게 악용되는 것을 의식한 것으로, 해외 네티즌들로부터는 ‘바람직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파이어폭스나 오페라가 액티브X를 지원하지 않는 이유도 악성코드 유포를 막기 위해서다.

■ 인터넷 뱅킹 돼야 다른 브라우저 쓴다

해외 네티즌들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액티브X를 줄여가는 MS의 행보가 불안으로 다가오고 있다. 앞서 밝혔듯 액티브X만을 철썩 믿고 만든 국내 인터넷 사이트들을 전부 뜯어 고쳐야할 진통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인터넷 환경에서 고립돼 ‘나홀로 IT 강국’으로 남지 않으려면 어차피 한번은 넘어야할 벽이란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셀 베이커 모질라재단 회장은 이달 한국 기자들과 가진 자리에서 “한국 네티즌들이 앞으로 나올 익스플로러라도 제대로 쓰려면 액티브X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MS조차 액티브X를 줄이고 있음을 강조한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액티브X의 족쇄를 끊고, 표준화를 지향하는 세계 추세에 따르려는 움직임은 아직 미약한 상황이다.

금융권에서는 신한은행과 농협이 각각 맥 OS와 리눅스 사용자를 위한 서비스를 2년 넘게 시행하고 있지만 다른 기관으로의 확대는 크게 이뤄지지 않았다. 익스플로러 이용자가 95%를 넘는 만큼, 금융기관들은 급할게 없을 수도 있다.

한 금융기관 관계자는 “한국서 점유율 3% 미만인 브라우저에 대한 인터넷 뱅킹을 지원할 계획이 없다”며 “절대 다수 사용자에 맞춘 당연한 전략”이라고 말했다.

이에 관해 다음 윤석찬 팀장은 “파이어폭스나 오페라 등 비주류 브라우저가 금융권에서 대접을 받으려면 그만한 점유율이 있어야 한다”며 “그러나 사용자 입장에서는 금융권의 배려가 먼저 있어야 비주류 브라우저를 선택할 수 있는 얽힌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한국 인터넷의 ‘탈 액티브X' 움직임은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먼저인가?' 하는 쉽게 풀리지 않는 선택의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네이버와 다음 두 국내 1,2위 포털이 파이어폭스를 지원한다고 나섰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역시나 브라우저 다양화의 키를 쥔 곳은 포털이 아니라 금융 사이트이기 때문이다.

NHN 권순선 개방형기술TF장은 “포털이 노력한다 해도 금융권의 결단 없이는 국내 사용자들을 다양한 브라우저로 이끌 수 없다”며 “세계 시장 2위인 파이어폭스만해도 국내 활성화에 몇 년이 걸릴지는 아직 짐작이 힘들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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