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 명예 연구원 프랜시스 앨런(Frances Allen)은 지난 수요일, 여성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A. M. 튜링상」 (A. M. Turing Award)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튜링상은 컴퓨터 공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위 있는 상이다.
앨런은 1957년 「포트란」(Fortran: Formula Translation)프로그래밍 언어 교육 담당자로 IBM에 입사했다. 그러나 곧 병렬 계산 관련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녀는 프로그램들이 2개 이상의 마이크로프로세서들에서 동시에 실행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병렬 프로세싱을 개발했는데, 이 기술이 오늘날 초고속 컴퓨팅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IBM 내에서도 베테랑으로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앨런과 함께 컴퓨터 공학의 미래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기술 분야 여성 중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녀의 작업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Q: 「미국 컴퓨터 학회」(ACM)에서 당신에게 「피트란」(Ptran) 관련성과를 바탕으로 A. M. 튜링상을 수여했다. 컴퓨터 공학자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당신이 이때까지 이루었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인가?
앨런: 피트란은 그저 내 작업의 일부였을 뿐이고, 이는 단지 사람들이 더욱 나은 조건에서 컴퓨팅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병렬 계산 컴퓨터를 이용해 성능을 향상시키는 개념이었다.
어렸을 적 어떤 경험을 통해 컴퓨터와 관련 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앨런: 나는 어렸을 때 상당히 외진 농장에서 살았다. 지나치게 외지지는 않았지만, 그저 뉴욕 주 북부에 위치한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중앙난방도 되지 않으며, 수돗물도 없었던, 그리고 무엇보다도 컴퓨터가 등장하지 않았던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다. 그러나 나는 농장에서 겪었던 나의 경험들이 어떤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자유롭게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었던 원동력이 된 것 같다.
정말인가?
앨런: 그렇다. 다른 사람이 이거랑 관련해서 연구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약 당신이 말한 대로 성장과정에 있어 컴퓨터와 관련된 부분에 전혀 노출이 되지 않았다면, 몇 세쯤 되었을 때 이러한 기술 관련 직업이 자신의 직업으로 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앨런: 그냥 빠져들었다. 나는 대학교에서 수학 교육을 전공, 고등학교 교사가 되는 방법을 배웠다. 이후 미시건 대학교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때 당시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IBM이 캠퍼스 신입사원 모집을 위해 우리 학교를 찾았다. 나는 취업을 통해 내 빚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IBM에 지원했다. 그 땐 나의 첫 목표였던 수학 선생님 이라는 직업으로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이 사용했던 첫 번째 컴퓨터는?
앨런: 650, 「IBM 650」이다.
당신은 여성, 그리고 컴퓨터 공학자들에게 모두 개척자로 통한다. 지금 생각해 보았을 때, 「아 그 때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앨런: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맬 때 당황하지 않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컴퓨터 공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다운 시간들을 보내었던 것 같다. 생각을 하는 데 있어서나 먼가를 시도하는데 있어 별다른 제약 조건이 없었다. 자유로웠던 샘이다. 정말 다른 시도들을 다양하게 해볼 수 있었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더 많은 지식이 축적되어, 어떤 것이 통하지 않는지 알고 있거나 하다못해 예상이라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고,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 때는 정말 한 연구자가 매우 광범위하게 실험을 전개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아무렇게나 페인트 칠 해볼 수 있는 백지 상태였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당신은 피트란 교육 담당자로 1957년 IBM에 합류했다. 당신이 처음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여성에 대한 처우나 환경은 얼마나 변화하였는지?
앨런: 나는 초기에 포킵시(Poughkeepsie)에 위치한 IBM 연구소에 입사하였는데, 이미 상당수의 여성들이 채용되고 있었다. 사실 이 중 실제로 바사(Vassar)를 비롯한 그 주변에 거주하던 여성은 거의 없었다. 몇 년 뒤에 알게 되었는데, 그 때 당시 IBM은 마이 페어 레이디스(My Fair Ladies)라는 팸플릿을 제작하며 활발하게 여성 인력들을 채용하고 있었다. 물론 IBM 남자들 또한 활발하게 채용하고 있었다. 딱히 지원자들이 충족시켜야 할 정확한 기준은 없었다. IBM은 단지 흥미로운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남자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당신의 직업 특성상, 여자로서, 일을 하며 현재까지 아찔했거나 상처를 입었던 순간들이 있었는가?
앨런: 오 이런! 그런 적이 있었다. 1960년대는 여성들에게 매우 힘든 나날들이었다.
왜 그랬는지?
앨런: 1960년대에 들어서 컴퓨터 공학이 과학으로 규격화 되었고, 이에 따라 컴퓨터 공학자라는 개념 또한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채용 과정에서 컴퓨터 공학자라는 범주와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들을 뽑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인물들은 모두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
상처 받았던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건 다른 기자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나는 IBM의 제품 창고에서 사용될 매우 거대한 기계에 적용할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 기계의 규모는 정말 엄청났다! 내가 처음 나의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기 위해 제작 과정에 있었던 기계를 보러 갔을 때였는데, 나는 한 무리의 남자 직원들과 동행했었다. 그렇게 기계를 향해 이동하던 도중 갑자기 모두가 멈춰서며 말했다. 아차, 기계를 보러 가려면 꼭 남자 화장실을 가로 질러서 가야 되는데. 이 컴퓨터를 제작하는데 상당히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던 관계로 그 한 가운데 상당히 큰 화장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신이 그 그룹의 유일한 여자였는지?
앨런: 아니다. 그 때 나는 매니저 직함을 달고 있었다. 총 4명의 매니저가 함께 일했는데 그 중 3명이 여자였다. 그 땐 여자들이 상당히 다양한 부문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승진도 했다. 매우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몇 년 뒤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1960년대 후반 IBM 매니저들이 모인 자리에 간 적이 있었는데, 100명 중 4명만이 여성이었다.
현재, 여성에게 기회가 다시 많이 제공되고 있는 것 같은지? 아니면 다시 기회가 많이 제공되기 시작한 시기가 있었는지?
앨런: 지금 현재 다시 기회가 많이 생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특정 분야에서는 아직까지 남초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어떤 방 안으로 들어가거나 식당에 들어서면 우선 남녀 비율부터 보게 된다. 난 대부분의 여자들이 다 그런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그다지 민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문제들은 매우 민감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성 직원들의 숫자가 줄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난 이런 남초현상에 대해 더욱 민감해 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현재 컴퓨팅 관련 업계가 직원 채용에 있어 그다지 올바른 선택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관련 업계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남초현상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앨런: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과학에 별로 관심 없어한다는 편견은 사실이 아니다.
여성들은 의약이나 생물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물리학이나 화학, 그리고 수학 부문에 있어서도 남녀 비율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실제로 학부 과정에서는 여자의 비율이 남자를 넘어섰다는 통계 결과도 나오고 있다.
이 질문의 또 다른 화두는 바로 삶과 일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느냐 인 것 같다. 이런 문제는 일의 종류에 따라 정해지는 것보다 회사 내부의 문화가 어떠한가에 따라 정해지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앨런: IBM 직원 중 상당수는 사무실이 없다. 집에서 일하는 것이다. 현대 기술은 재택근무를 가능케 했고, 실제로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실제 일터에서의 문화는 이러한 흐름과 역행하는 경향이 있어, 반드시 직원들이 자신의 자리에 오랜 시간 동안 앉아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팽배하다.
나는 현재 IBM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여기는 그런 분위기나 고정관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연구소 직원들 또한 재택근무 대신 사무실 근무를 택하게끔 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흥미로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다른 연구원들과의 긴밀한 관계가 도움이 되고, 또 서로 간에 지적인 자극을 유발,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컴퓨터 업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인재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몇몇은 우수 인재들을 끌어 모을 인센티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또 몇몇은 미국 교육 시스템에 그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앨런: 나는 ACM의 「직업 이동 태스크포스」(Job Migration Task Force)팀의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이 당시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요인들은 올바른 답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매우 안타까운 사실은 수많은 여성들이 IT 인재 풀에 속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잠재적인 가용 자원 중 50%를 무시, 제외한다면, 인력 수급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하면 젊은 사람들이 수학, 과학, 그리고 기술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지?
앨런: 사실 딱히 내가 말해줄 수 있는 답은 없다. 너무 방대하고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컴퓨터 기술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멘토(Mentor)의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IBM은 당신의 이름을 딴 멘토링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럼 멘토로서 당신이 지금까지 거둔 가장 뛰어난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앨런: 멘토의 역할은 흔히 조언을 해주고, 사람들이 고민이 있을 때 찾아올 장소를 제공해주고, 그들이 내려야 할 다양한 결정들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주며, 또 특정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더불어 그들의 옹호자가 되어 준다. 특히, 나는 여성들을 대변해주고 옹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설문조사를 보면 대형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점점 해외 인력의 비중을 높여가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자신의 직업을 잃을까 걱정하는 국내 직원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
앨런: 일단,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부분은 결국 국내 인력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해 주고 싶다. 사실 업무의 해외 이전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질의응답 같은 업무들은 이미 해외로 이전된 상태이다.
예전에는 기계나 인프라 구축과 같은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부분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고, 또 이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기본적인 솔루션들과 더불어 수학부터 재무, 그리고 비즈니스 모델링까지 여러 분야의 정보들을 조화롭게 활용, 통합하는 하는데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향 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줄 수 있는 지?
앨런: 어떤 약이 효력이 있고, 또 환자들은 어떤 증상을 보이는 지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고 통합하는 건강관리 부문 또한 해외로 이전될 수 없는 또 다른 부분 중 하나이다. 이 부분은 상당한 혁신과 통합이 현재로서 필요한 부분이다.
월마트(Wal-Mart)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이 회사는 인사관리, 재무관리, 재고 관리, 공급망 관리 부문을 모두 한 패키지로 통합해버렸다. 이러한 노력이 건강관리 부문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상에는 상금 100,000 달러가 함께 제공된다. 어디에 사용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았는지?
앨런: 그렇다. 나는 이를 가난한 사람들이 교육의 기회를 제공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펀드에 넣을 생각이다. (물론 이 상금만큼의 금액은 내가 직접 그 출처를 관리할 예정이다.)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그 혜택을 나누어 주고 싶다. 다른 방법으로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 받을 수 없는 젊은 여성들을 지원하겠다는 이야기이다. 한 때 극동 지방으로 여행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우리와 비교하였을 때 4년제 대학교 등록금이 비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닐 능력이 없는 젊은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몽골의 어느 한 고아원을 방문하면서 정리된 것이다. 그곳의 어린이들은 대부분 유목민들의 자식이었다. 또 부탄에는 컴퓨팅을 전공과목으로 보유하고 있는 대학교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마저도 지원하는 학생이 많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신은 매우 열렬한 등산 팬으로도 알려져 있다. 미국 알파일 클럽과 캐나다 알파인 클럽을 모두 가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육체적인 취미를 가지는 것이 컴퓨터 공학과 같은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균형 잡힌 삶은 살아갈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가?
앨런: 이런 활동들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나는 새로운 것을 탐험하는 것을 좋아하니, 어쩌면 내 삶의 일부분인 셈이다.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공간들, 그리고 세계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티베트, 몽골, 부탄과 같은 유목민족 국가들도 둘러보았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런 국가들을 돌아다니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도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향 후 계획은?
앨런: 인도로 여행을 갈 예정이다. 나는 이 상이 내게 준 기회를 잘 활용하여, 앞으로 변해야 할 것들을 변화시키는데 이용하고 싶다. 아니면 적어도, 여자들을 위한 기회, 그리고 우리가 현재 영위하고 있는 기술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회들에 대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난 현재까지 컴퓨팅 기술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혜택 보다, 앞으로 가져다 줄 혜택이 훨씬 더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앨런: 나는 사용자들이 조금 더 편하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 언어가 탄생하는 것을 보고 싶다.
내가 유저 인터페이스에 직접 관여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 분야에는 또 뛰어난 전문가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매우 고성능을 컴퓨팅 기계를 만들어 내고 있고, 이들은 점점 빨라지고, 또 거대해지고 있다. 물론 물리적인 크기 면에서 거대해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 범위가 거대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계들을 조금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실 이미 이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작업이 있다. 아니타 보그 인스티튜트(Anita Borg Institute)와도 많은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을 지속할 예정이다.
최초의 여성 A. M 튜링상 수상자로써 사람들에게 해 줄 말은?
앨런: 나는 한 가지만 강조하고자 한다. 내가 이렇게 성공한 이유는 유능한 동료들이 함께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한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와 같은 느낌의 경험을 가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말 회사 생활과, 연구 결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